현석이의 행복

2022. 4. 19. 19:37대한민국 시사

단편소설

현석이의 행복

堂井 김장수

 

프롤로그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현석은 부모님과 모두에게 사랑받으며 자랐다. 그 덕분에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에 나온 주인공의 일생은 물론 통일 한국의 발전과정을 엮어서 적었다.

 

장래의 꿈을 위하여

성재(醒齋) 장현석은 2013년 3월 31일 서울 광진구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똑똑했다.

7살 때 지능지수를 검색해 보니 170으로 K-WAIS 기준에서는 ‘최우수’였다. 부모님의 피를 이어받아 똑똑한 머리를 유지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교내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상을 타고, 학교 밖에서 한국과학창의력 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

자칫하면 부정수상으로 오해를 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석이는 정직했다. 결코 부정행위를 저지른 적이 없는데다가

오히려 최선을 다할 정도였다. - 중학교 때는 전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전교 1등을 4번이나 했고, 제일 못한 때는 전교 5등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TEPS 영어능력 검정 시험에서 가장 높은 1+ 등급(900점 이상)을 받고

IET 주관 국제영어대회에서는 서울지역 대상을 받았다. 게다가 현석이는 한 번도 학원에 다닌 적이 없었다.

현석이가 다니던 고등학교 2학년 학교생활기록부에는

“영어신문을 제작하는 데 뛰어난 열의와 자질을 보였고, 부반장으로서 리더십을 가지고 부원들을 이끌었다.”

라고 적혀 있었다. 현석이의 꿈은 고등학교 때는 외교관이었다. 게다가 여자 친구들이 많아 그녀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사랑받으며 이룬 가정

부모님도 외아들인 현석이를 소중하게 대했다. 어쩌다가 아들이 공부하다 지치면,

“현석아, 피아노 연주 할까?”

하면서 피아노 1시간 연주 이외에도 독서, 영어 공부, 축구경기 시청을 함께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방에서 공부한 현석이는

중학생 때부터는 자신의 신체리듬을 위해 정해진 시각에 잠을 잤다. 부족한 과목은 부모님이 자상하게 가르쳐 주시니

현석이가 전교 1등을 탄 것도 당연한 이유였다. 한번은 현석이가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과 농구를 했는데, 이를 본 어머니의 친구가 전화로

“현석이 엄마, 네 아들 지금 농구하는데, 끝나고 바로 온다니까 걱정하지 마.”

라며 현석이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물론 집에서 현석이가 칭찬을 받고 어머니가 현석이를 꼭 안아주며,

“우리 아들, 앞으로는 제 시각에 들어오렴. 농구도 좋지만 다른 공부도 해야지.”

라며 꾸중과 체벌은 받지 않았고, 저녁식사를 푸짐하게 대접했음은 당연했다.

부모님도 현석이도 서로 간에 사이가 돈독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어머니의 기대

어머니의 꿈은 자식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꾼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부모의 이기심 때문에 자식이 망가지는 예가 흔하다.

하지만 현석이는 오히려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친구들은 친절한 현석이 부모님의 사랑을 느껴

현석이네 집에 자주 놀러가곤 했다. - 훗날 현석은 이 시절이 ‘내 인생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고 술회했다.

물론 현석이 부모님도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 부부싸움 하나 없이 말이다. 방학이면 친척집에 놀러가곤 한 현석이기에

친가 쪽, 외가 쪽, 그리고 처갓집에서도 현석이를 사랑으로 대했다고 한다. 결코 욕심으로 분출되지 않았다.

부모님과 현석은 하루에 한두 시간씩 대화를 나누고, 방학이 되면 외갓집이 있는 강원도 강릉에 가곤 했다.

집 근처에 있는 광진구 어린이대공원에 저녁을 먹으러 갔고, 현석이가 어머니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저녁을 먹으러 가곤 했다.

현석의 어머니는 한결같이 현석이를 사랑으로 대하고, 돈을 절약해서 매일 고기반찬을 해 주셨다.

그 교육열이 현석의 빛나는 오늘을 있게 했다. 물론 엄마는 완벽주의자는 아니었어도 자신이 평범한 주부이기를 바라시는 모양이었다.

 

공부에 전념하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1학년 1학기 수학 성적이 중학교 때처럼 좋게 나오지 않을 때도 한때 있었으나,

2학기부터 2학년 때에는 당당한 100점이었다. - 현석이는 자신의 성적이 고득점이라 해서 성적을 위조할 만큼 비겁하지는 않았다. -

수능 모의고사인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는 전국 1등이었다. 고2 말에 입시가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어머니가 탕수육을 해 주셨다.

“현석아, 이거 먹고 꼭 대학에 가렴. 그러면 엄마가 너 결혼시켜 줄게.”

현석이 어머니는 그 정도로 인자하신 분이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었고,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성경도 가르쳐 주시곤 했다. 물론 예배는 주일마다 드리기는 했으나, 헌금은 조금이나마 하는 편이었다.

평소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친구들은 적당히 사귀는 편이었다고 한다.

이런 어머니를 둔 현석은 2031년 11월 14일, 부모님의 응원 속에 좋아하는 한 가지 과목으로 대학 입학시험을 보았고,

물론 전국 1등에 ‘수능 대박’을 터뜨린 ‘대형사고’를 쳤다. 부모님은 자식이 대학에 전국 1등으로 입학한 것에 기뻐했지만,

대학 졸업은 쉽지 않았다. 요즘 한국 대학은 입학이 쉬워도 졸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현석은 4년제 대학의 외교학과를 어렵게 졸업했다. 학기가 올라갈수록 시험이 어렵게 출제되었기 때문이었다.

졸업 당일 축하파티가 열렸고, 부모님도 기뻐하셨다.

 

졸업 이후

졸업 이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좋아하던 여자 친구를 만나,

“이제 대학을 졸업했으니, 결혼해서 아기 낳자!”

이렇게 선언을 한다. 양가 부모님도 선을 보고 나서 좋아하는 여자 친구 정선희와 결혼식을 치렀다. 2036년 1월 12일의 일이었다.

얼마 후에는 주일(駐日) 대사가 되었고, 2039년 11월 2일에는 장남 선혁이를 낳았다. 부모님은 당연히 기뻐하셨다.

부임하러 일본으로 갔을 때는 양가 부모님이 전송을 해 주셨다. 떠나기 장인어른, 장모님께 자신의 부모님의 장래를 부탁했기에

아무 탈 없이 일본으로 떠날 수 있었다.

 

일본에서

일본 도쿄 주일본 한국대사관에서 현석은 한국의 국가 발전과 국가이미지 상승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K-POP 도입과 한류 지원,

극우 세력으로부터 한국인을 보호하는 것, 재일 교포를 돕는 것, 한국 이미지 쇄신 등 현석이 할 일은 많았으나,

일본 정부의 방해는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국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기에

현석은 마음 놓고 자신의 업무에 전념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 2042년 1월 3일에 도쿄에서 차남 선길이를 낳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재일교포, 일본 주민들, 심지어 일본 정부에서도 축하를 해줄 정도였다.

참, 통일 후 조총련은 소리도 흔적도 없이 해체되었다.

 

2042 통일 한국 월드컵

얼마 후인 5월 30일에 통일 한국에서 월드컵이 열렸다. 16조 3국 참가, 48개국 출전이었다.

과거에 16강 6경기 제도 때와는 다른 분위기여서, 통일 한국의 슬기와 맹위를 만방에 떨칠 정말 좋은 기회였다. -

16조 3국 참가 제도는 2026 북중미 월드컵부터 시작되었다. - 32강 체제에서 한국은 예선 A조에 속했는데, 대진표를 보면 다음과 같다.

 

A조 – 통일 한국(아시아), 잉글랜드(유럽), 브라질(남미)

B조 – 뉴질랜드(오세아니아), 슬로베니아(유럽), 터키(유럽)

C조 – 나이지리아(아프리카), 멕시코(북중미), 베네수엘라(남미)

D조 – 알제리(아프리카), 베트남(아시아), 스코틀랜드(유럽)

E조 – 프랑스(유럽), 미국(북중미), 우즈베키스탄(아시아)

F조 – 크로아티아(유럽), 엘살바도르(북중미), 세네갈(아프리카)

G조 – 이집트(아프리카), 이스라엘(유럽), 온두라스(북중미)

H조 – 자메이카(북중미), 에콰도르(남미), 스페인(유럽)

I조 – 스웨덴(유럽), 캐나다(북중미), 아르헨티나(남미)

J조 – 일본(아시아), 남아공(아프리카), 칠레(남미)

K조 – 페루(남미), 포르투갈(유럽), 벨기에(유럽)

L조 – 네덜란드(유럽), 중화민국(아시아), 토고(아프리카)

M조 – 타이(아시아), 케냐(아프리카), 이탈리아(유럽)

N조 – 호주(아시아), 코스타리카(북중미), 스위스(유럽)

O조 – 독일(유럽), 폴란드(유럽), 가나(아프리카)

P조 – 카타르(아시아), 에티오피아(아프리카), 파라과이(남미)

 

이 대진표만 보아도 내로라하는 세계 강팀들이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통일 한국의 강함은 여전하여 그 용맹을 주저 없이 떨쳤다. 재주 많고 유능한 선수들이 많았고,

통일 한국 초기 잠시 갈등했었던 국민들의 구심점을 찾아내어 결집시키는 것이 큰 숙제였기에

이번 2042 통일 한국 월드컵은 매우 중요한 축구 행사였다. 국민들의 하나 된 응원도 크게 힘을 보탰다. 어딜 가나 붉은 옷 물결이었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어딜 가나 한국 응원단이 넘쳐났다. 통일된 지 10여년 만에 눈부신 단결력과 빛나는 발전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해외 교포들은 당연히 한국을 응원했고, 타 팀 응원단은 한국 응원단의 응원에 위축되곤 했다.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등의 구호가 전 세계에 울려 퍼짐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월드컵 경기에서

통일 한국 월드컵 본선은 5월 30일에 열린 A조 예선에서 시작되었다.

저녁 6시, 첫 경기는 통일 한국과 전통적 축구종가 잉글랜드의 경기였는데,

잉글랜드는 요즘 새롭게 떠오르는 스포츠 강국인 통일 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과는 7:0 한국의 완승.

홍경수 선수의 해트트릭으로 잉글랜드를 쉽게 꺾었다. 물론 현석도 열심히 통일 한국을 응원했다. 열심히 응원한 보람이 있었기에,

현석은 통일 한국의 용맹을 만방에 떨칠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 있었다. 다음 경기는 브라질과의 경기였다.

6월 18일 오후 5시에 열린 이 경기는 통일 한국의 승리로 끝났다. 최종 스코어 12:0. 엄청난 격차였다. 32강전에서는 터키를 3:0으로,

16강전에서는 스코틀랜드를 4:0으로, 8강전에서는 이스라엘을 7:0으로, 4강전에서는 일본을 34:0으로 꺾더니,

결승전에서는 베트남을 만나 4:0으로 이겨 우승했다. 통일 한국이 정치, 경제, 윤리, 과학, 스포츠, 종교, 문화, 생활풍속, 예술 등에서

크게 그리고 만방에 빛나는 모습을 보니 현석은 조국 대한민국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과거에 비해 더 강해진 조국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워서 현석은 그만 눈물이 났다. 월드컵이 끝나도 통일 한국의 이미지는 좋아졌고,

한국의 국력은 더 강해졌다.

 

통일 한국의 이상은 높다

통일 한국은 남한으로는 인천, 평택, 군산, 새만금, 목포, 제주, 부산, 울산, 동해, 북한으로는 해주, 남포, 다사도, 원산, 금강산, 흥남, 단천,

학성, 청진, 나진에서는 해상에서 조선(造船), 무역, 해운 등에서 앞다투어 경쟁적으로 발전을 하려고

사통팔달(四通八達) 물류 강국이 되었으며, 육지에서 함경북도에서는 나진, 온성, 회령, 무산, 삼지연,

함경남도에서는 혜산, 함흥, 북청, 고원, 평안북도에서는 통합 강계, 삭주, 정주(定州), 구성, 신의주, 영변,

평안남도에서는 안주, 개천, 성천, 순천(順川), 평양, 남포, 강서, 강동, 황해도에서는 사리원, 통합 황주, 해주, 장연, 옹진,

경기도에서는 개성을 비롯해 수도권이 교통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원산 선덕비행장, 삼지연비행장, 청진공항, 연길공항,

의주공항이 개발되었으며, 평양 순안에서는 활주로와 공항터미널이 확장되었다.

벽성군 동부에는 개성공항과 해주공항이 통합, 이전하여 중형 공항으로 발전했다.

신의주 서쪽과 이어도 부근의 유전(油田) 개발로 통일 한국은 산유국이 되었고, OPEC에도 가입했다.

개마고원에서는 풍력발전이 성행하였으며, 독도에는 해양과학기지가 건설되었고,

대마도가 한국에 편입되면서 대마도 개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연변이 함경북도에 편입되고, 간도 또한 한국의 영토가 되었다.

개성도 디지털밸리가 설치되어 개성공단이 발전하여 통일 한국에 투자하겠다는 기업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으며,

한국에 다국적 기업을 만들겠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또한, 쓰레기 재활용 기술도 눈부시게 발달하여,

어느새 폐수 문제니 공해니 하는 문제와, 태평양의 쓰레기섬과 소각장, 해양 쓰레기란 말은 이미 케케묵은 옛말이 되었다.

그렇다고 부정부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통령이 그것을 그냥 넘길 위인이 아니어서 부정부패와 일제 잔재가 근절되었다.

또 곳곳에 태양광 발전소와 수소에너지 발전소, 친환경 전기 발전소가 지어지니, 통일 한국은 ‘전력 강국’이 되었다. -

그렇다고 수력, 화력,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문제와 그 효과를 도외시할 수는 없다 -

이제 통일 한국은 문화와 예술, 한류열풍으로 세계를 정복해 나가고 있었다.

나폴레옹이나 세계 정복자들이 하지 못한 세계 정복의 꿈을 통일 한국은 차근차근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

서로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내며 통일 전 대한민국이 이루지 못한 경제 강국의 꿈과 김구 선생이 꿈꾸던 통일 한국의 꿈을 하나씩,

조금씩 이뤄가고 있었다.

 

현석이네 가족이 이룬 통일의 혜택

현석 가족이 누리는 남북통일의 혜택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세계 모두가 통일 한국을 기준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심지어 만주 대륙을 접수해 버리니, 러시아나 통일 몽골과 국경을 맞댐은 당연했다.

이 부강한 나라가 국민에게 배당금 1인당 150만원씩이나 주니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 풍속도 아름다워져,

휴전선과 술과 담배 문화, 38선 같은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자리도 늘고, 먹고사는 게 안정되니

원하는 꿈을 누구나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내 집 마련의 꿈도 다시 되살아나 결혼, 출산, 연애 등도 저절로 늘어나,

2043년 1월 통일 한국의 인구는 자그마치 – 만주 지역을 합해 – 1억 7천이나 되었다. 그렇게 자원이 많아져서

부강한 나라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최고로 좋은 나라가 되었으니, 이젠 한국을 싫어하는 나라는 아예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석은 통일 한국이 누리는 혜택을 덩달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의 분단의 장벽은

북한과 남한 사이를 어색하게 했을 뿐 아니라,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서로를 이해하고 상부상조(相扶相助)하여 서로 돕는 과정이 있었기에 통일 한국은 전보다 더 강한 나라가 되었다.

아예 행복한 통일을 이룬 것이다. 현석 가족이 가는 곳마다 ‘한국이 최고다, 한국은 강하다’라는 소리를 외국인들이 말하였고,

외국인들도 한류열풍에 힘입어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전보다 늘어났다.

2044년 3월 30일에 정부에서 주일 대사직을 교체하여서 현석이 가족들과 함께

한국 서울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의 후신)으로 들어왔을 때, 인공지능 강국, IT강국으로 이름난 한국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경기도와 서울, 인천이 연합하여 서울로 통합된 한국에서 전 세계에 한류열풍이 불어서 전국 농장에서 세계적 식량구호에 앞장서고,

외국인 투자가 급격하게 증가했으며, 통일 한국의 신용등급이 급상승했다. 남한보다 개발이 늦은 북한에도 개발의 열풍이 불어서,

가는 곳마다 아파트는 기본이고 철도, 도로, 수도시설 등 안 갖추어진 곳이 없고, 심지어 KTX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은 국립공원이 설치되었으며, 동해선(부산~울산~경주~포항~영덕~울진~동해~정동진~강릉~속초~간성~

통천~원산~함흥~학성~길주~청진~나진~두만강~블라디보스토크~시베리아), 서해선(신의주~정주~평양~개성~대곡~소사~홍성~대천~장항~부안~영광~임성리~제주) 철도가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 대륙을 넘어 유럽까지 닿게 되었고,

강대국인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도 통일 한국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 사모(思慕)할 나름이었다.

또, 이제는 북한에도 자유가 주어져 남한이 1948년 이후로 누리고 있는 자유를 북쪽 주민들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법을 어길 자유까지 주는 것은 아니었기에 -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만 -

법을 어기는 북한 주민은 통일 이후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한국 유치원에 들어간 선혁이

현석이 바쁘던 날의 아침이다. 아내 선희가,

“선혁아, 아빠 바쁘시니까 유치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들어야 한다, 알겠지?”

“네, 엄마.”

이러면서 아내 정선희는 아들을 유치원에 보낸다. 선혁이는 한창 아이들을 사귈 나이였기에, 유치원 선생님께 한국어를 다시 배워야 했다.

왜냐하면 어릴 때 일본에서 민단을 통해 어렵사리 접했기 때문이었다. 선희는 선길이도 돌보며 맛있는 것도 많이 해준다.

선길이는 아직 2살배기 아기였기 때문이다.

아빠 현석은 외교관으로서 환경단체에 가입하였고 얼마 후에는 환경부에 들어갔는데,

선진국의 재활용 기술을 도입하여 한국의 재활용 확률을 100%로 끌어올리기 위함이었다. 외교통상부에서도 현석을 도와주었으며,

아내도 이런 현석을 이해해 주었다. 쓰레기 재활용과 버려진 책을 가져다가 소독 후 되파는 방식도 도입했으며,

지금까지 소각과 매립에 철저히 의존했던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선진 재활용 기술을 응용하여,

과거 쓰레기 매립지 문제로 골치가 아파 곤란했던 환경단체와 재활용업체에서는 선진 기술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3~4년이 지난 후, 쓰레기 재활용 비율이 100%를 달성했다. 물론 이제는 쓰레기를 길가에 버리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각 자재별로 분리수거와 쓰레기 재활용을 모두가 생활화하게 되었다.

한편, 한국 유치원에서는 선혁이를 귀여워해 주었으며, 동생 선길이는 아주머니들의 귀여움의 대상이 되었다.

집안에서 선혁이는 동생과 사이좋게 지냈으며, 결코 말썽을 피운 일이 없었다. 추석이나 설날이 오는 날이면 현석 부부와 두 아들은

부모님이 계신 부모님의 고향인 서울 가평군으로 놀러 오곤 했다. 추석에는 부모님과 가정예배를 드리고,

설날이면 오히려 현석이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곤 했다. 현석이 부모님도 손자들에게 세뱃돈을 주곤 하셨다.

통일 한국의 영광은 현석이 부모님께 크나큰 효도가 되었다. 왜냐하면 나라에서 국민배당금 150만원과 노인연금 70만원을

매달 주기 때문이었다. 국가의 수입은 국내 특산물 수출 이외에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수출과 무역 중에 나오는 수입으로

국가 재산을 충당했고, 국가예산의 70%를 절약하며 아껴 쓰니 국민배당금을 넉넉히 줄 수 있었다. 또 그것으로 인해서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출산수당을 주고, 대학까지 등록금 또한 무료였다. 참, 현석 부부는 결혼 때 결혼수당을 받았다. -

결혼수당은 평생 1번뿐이며, 결혼부가 신설된 지 오래였다.

 

생일날의 기적

2045년 3월 31일, 성재(醒齋) 장현석의 32세 생일날이었다. ‘딩동’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보니,

대통령이 생일케이크와 축하금 10만원, 선물까지 준 것이었다. 생일케이크 배달부에게,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이랬더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이 관혼상제까지 챙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관혼상제는 개인이 스스로 챙길 수밖에 없었지만,

새 대통령이 시시콜콜 책임을 지고 다 해주니 고마운 한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개개인이 세금을 스스로 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세금 포인트가 차곡차곡 쌓였는데, 그 세금 포인트로 신용이 회복되고 새 사업을 할 수 있으며,

죽으면 위로금에 국립묘지에 묻히니 나라가 관혼상제와 취업, 교육까지 다 책임져 주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게다가 군대도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확정되었기에 직업군인이 늘어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근면과 성실

하지만, 그렇다고 통일 한국 국민은 게으른 상태로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공짜를 좋아했던 나우루와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잘 보았기 때문이었다. 원래부터가 근면하고 성실한 대한민국 국민이었기에, 일손이 모자란 곳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

재난 피해주민, 이재민,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실업자, 저소득층, 불우이웃 등을 도와주며 구제를 해주고,

학교폭력이라든가 학교 일진이든 조폭이든 인신매매든 동네 불량배든 소매치기든 힘을 합쳐서, 자경단 비슷한 단체를 만들어 응징하였다. 또한 교통법규를 잘 지켰으며, 폭주족이라든지 뺑소니라든지 납치라든지 대형트럭 등으로 교통사고가 났다 하면

시민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 또, 스포츠를 통해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고, 스포츠 경기가 열렸다 하면 그 곳에 가서 응원을 열정적으로 했다. 그리고 목욕탕에 가서 몸을 깨끗이 했으며, 문화예술 면에서도 연거푸 공을 세웠다. 북한 개발, 발전기 설치, 고속도로 건설, 철도 개통,

농업뉴딜단지, 환경운동, 분리수거, 거리 청소, 학교 청소, 노인정 봉사, 자원봉사, 여러 가지 생산과 조립, 장애인 복지 등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 국민은 원래부터가 근면성실하고 강한 국민들이었다. 그 국민성으로 어려울 때마다 단결하여

IMF, 2002 월드컵, 세월호 사건, 코로나 19 등 여러 가지 역경도 함께 이겨내자, 세계가 놀라서 한국에 대한 투자매력이 높아졌다.

통일 한국은 원래부터 강한 국민성으로 갖가지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갔다. 통일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임종

2047년 11월 4일, 막내딸 선미가 태어났다. 큰오빠 선혁은 초등학교 2학년, 작은오빠 선길이는 5살이었다.

그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래서 아내를 데리고 아버지의 병원으로 갔더니, 급성 복막염이란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이미 혈관까지 전이됐습니다.”

이 말에 통곡하는 어머니와 기도하는 목사님. 아버지의 임종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마지막으로……, 아기를, 안아보고 싶구나….”

그 말을 들은 현석은 막내딸을 아버지의 곁에 두었으나, 팔에 힘이 없어,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라…. 내 재산의 일부는 사회에 기증해라. 남은 삶을 값지게 채우는, 그것이 바른 행동이다…….”

이 말을 남기고 현석의 아버지는 조용히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2세. 아버지는 유서에서 아버지의 유산은 기부를 하라고 쓰여 있으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언이라고 해도, 어려운 이웃을 두고 볼 수는 없구나. 그렇다고 이 유산을 그냥 묻어둘 수는 없고…….”

이어서 한 말씀 하신다. 어머니의 한 마디,

“차라리 유니세프에 아버지의 유산 일부를 기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렇게 하세요. 통일 한국은 다행이니까 세계의 아이들을 돕는 것이 우리의 목표예요.”

“그렇게 하자꾸나.”

현석과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산 일부를 유니세프에 기증했다. 장례 지원금 1000만원의 절반인 500만원은 복지관에 기부했다.

기부 목적은 복지관 일자리에 쓰였고, 나머지 절반은 축구 발전기금에 기부했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세월은 흘러 현석도 75세가 되었다. 현석이 정년퇴직 후 6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현석도 나이가 들었다.

자식들도 결혼하여 나이가 든 현석 부부는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가 너무나도 나이가 들어 관절염에 심장병이 겹쳤다. 하지만 자식들이 병원에서 관철 수술을 해서 완쾌되었다.

 

아내를 여의고

87세에 아내를 여읜 현석은 홀로 남았다. 자식들도 손자들도 국민배당금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현석은 89세의 노익장에도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여 2102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90세의 나이에도 회고록을 썼다.

회고록의 이름은 《통일 이후 한국살이》였다. 이 회고록에서 현석은 이렇게 밝혔다.

 

만일 내가 부모님을 잘못 만났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받고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헬조선’에서 ‘세계강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라던 지상낙원이었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주변과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고,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며 바른 학문과 배양된 체력, 실력을 가지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다. 이제 옛날의 대한민국으로 돌아가선 안 된다.

여러분은 더 행복한 통일을 위해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실천과 모범으로 행동하기 바란다.

 

이 회고록을 쓴 지 얼마 안 되어 2103년도 막사이사이상을 받게 된다.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환경운동으로 노력한 결과가 결실을 맺게 된 것이었다.

 

100세 이후

102세의 나이까지 농사꾼으로 활동한 현석. 하지만 그도 자연의 법칙만은 어길 수 없어 흰머리가 늘었다.

장남 선혁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환경운동과 남극 보호운동, 북극곰 보호운동에서 활동했고,

차남 선길은 네덜란드, 벨기에, 핀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돌아다니며 대사직을 역임했고,

막내딸 선미는 환경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북마리아나제도에 가서 활약했다.

그렇게 자식들이 환경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여 흡족한 현석. 말년에는 가평의 어느 교회에 등록한 그는 기도로 나날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끝내 쓰러졌다. 2122년 4월 15일,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모두 수고했다. 나는 너희 세 명의 어머니와 너희 조부모님 곁으로 간다.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고, 유산은 모두 기부하도록 해라.

나는 천국에서 너희들을 지켜보겠다. 천국에서 만나자. 꼭 남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

이 말을 남기고 성재 장현석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9세. 유골은 화장되어 서울 가평군 뒷산에 묻혔다. 훈장이 추서되었고,

장현석 가문은 환경 가문으로 크게 활약하며 현석이 죽은 후 2130년에 ‘성재 장현석 지구 환경 돌보기 운동’이 창설되었다.

이 운동은 전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지구 환경과 오존층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성재 장현석의 죽음이 헛되지 않은 것이다.

어느덧 2134년에 이 운동은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이 운동이 헛되지 않아 세계 환경에 큰 영향을 가져온 것이다.

성재 장현석은 가평군 뒷산에 묻힌 채로 가평 땅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려고 생전에 노력한 결과 아니던가.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환경 분야에서 후회 없는 활약을 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우리 모두 사랑하며 지내자.’

 

에필로그

우리는 환경을 소중히 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우리가 되자.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도 할 말이 생길 것 아닌가.

지구 환경을 소중히 함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지구를 소중히 아껴주자.

우리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이것뿐이다. 주인공 현석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 모두의 사랑과 관심으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 모두가 알아야 할, 그리고 반성해야 할 모두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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