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선수 김인석(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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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선수 김인석 15(마지막회)
최후세월이 흘러 대암(大巖) 김인석은 어느새 노인이 되었다. 2089년 4월 11일에는 태은(邰隱) 전경문이 세상을 뜨고7월 4일에는 아내를 잃었다. 8월에는 인석도 병이 들어 말은 할 수 있어도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중풍이 온 것이다.종국(終局)에는 인석도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세인(世人)들은 유명한 금메달리스트가 장애인이 되었다는 근황을 안타까워하며인석을 도와주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인석도 세월의 흐름은 거역할 수 없어서중풍에 심장병을 앓았다. 10월 11일, 마지막을 직감한 인석은 두 아들을 불러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가자고 했다.산책을 가다 보니 얼마 안 가, 비가 그친 하늘을 보니, 문득 어머니가 떠오른 것이었다.‘어머니…….’너무나도 그리운 이름을 부른 인석. ..
2024.10.04 -
배구선수 김인석 14
두 아들경재 김상기는 부친을 닮아 키가 크고 배구를 잘 했다. 훗날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어 학교에서 배구를 가르쳐좋은 스승으로 학생들과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비록 아버지처럼 배구선수가 되지는 못했어도 공부를 열심히 하여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국어 선생이 되었다.송촌 김상욱은 할머니가 라면을 끓여주시는 솜씨를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아통일 한국에서 가장 라면을 잘 끓이는 요리사가 되어 외국으로부터도 여러 번 초청을 받았다.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은연중에 이룬 셈이 되었다.
2024.10.04 -
배구선수 김인석 13
어머니의 부고, 그리고2037년 12월 2일, 배구 감독을 하던 도중 어머니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셨는데,폐렴이 심장으로 전이된 것이었다. 너무나 큰 슬픔인지라 인석은 어머니를 부르며 슬프게 울었다.자신을 키우시느라 온갖 고생을 다하시고, 장애에서 완쾌되어 해피엔딩인가 싶던 어머니의 일생.유언은 라면집을 인석에게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어머니는 이 세상에 없다.장례는 어머니가 다니시던 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기도를 드리며 인석은 생각했다.‘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못 다한 꿈을 이루겠습니다.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만나요. 어머니, 그래도 보고 싶어요.나는 어머니를 사랑했습니다. 살아 생전 한 번도 그런 말은 못 했지만, 사랑해요, 이제는 편히 쉬세요.제가 없는 세상에서 아버지와..
2024.10.02 -
배구선수 김인석 12
통일 한국은 세계의 빛통일 한국은 어느새 세계의 빛이 되어 있었다. 남북이 사이좋게 지내고 핵과 미사일을 계속 개발하던 작태,백두혈통이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은 이미 옛말이 되었다. 또한 남북이 힘을 합쳐 살기 좋은 통일 한국을 만들어 가니통일 한국은 어느새 옛날보다 더더욱 발전해 있었고, 정치, 스포츠, 외교, 경제, 문화, 예술, 종교 등 여러 분야에서도한국의 위상을 높여 나가고 있었다. 무역도 발달하여 사통팔달의 중심지가 된 지 오래였고, UN 본부와 그 산하기구,FIFA, IOC의 판문점 이전으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한류열풍은 말할 것도 없고전국의 농장들이 전세계에 농작물을 수출, 기아(飢餓) 구호에 앞장섰다.또한, 철도도 한국을 출발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이어지게 되었고 북한의..
2024.09.30 -
배구선수 김인석 11
은퇴 이후2032년 12월 23일, 둘째 아들 송촌(松村) 김상욱이 태어났다. 어느새 인석은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다.헬싱키 어느 아파트에서 두 아들을 키우면서 인석은 아들들에게 가난을 물려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다음해 3월 23일 헬싱키 배구팀을 은퇴한 후 귀국하여 통일 한국의 남자 배구 감독이 되었다.감독이 된 인석은 선수 하나하나에게 맞는 기술과 부상 선수들에게 온정을 베푼 일, 선진 기술과 충분한 배구용품, 훈련,선수들에게 맞는 기술을 익히도록 한 것, 학교폭력이 없도록 한 것 등으로 여러 가지 칭찬과 상을 받았다.물론 통일 한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많은 상과 훈장을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국의 훈장과 상도 많이 받았다.또한 어머니께 두 아들을 보여드리니, 어머니는 어느새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된..
2024.09.26 -
배구선수 김인석 10
타향에서그 후 인석은 핀란드 배구팀에서 활약했다. 핀란드 배구팀의 실력은 그나마 알아줄 만했지만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몰도바 등 동유럽 팀들을 잇달아 이겼다. 그래서 최고의 선수로 우뚝 섰다.항상 부상을 조심하면서 말이다. 2026 아이치·나고야 아시안게임, 2028 LA 올림픽과 2030 도하 아시안게임,2032 브리즈번 올림픽에도 인석의 활약은 계속되었다. 통일 한국의 대표팀에 소속되어서 금메달도 많이 땄다.타향인 헬싱키에서 인석은 잘 적응해 가고 있었고,바른 생활을 하면서도 늘 처음 헬싱키에 왔을 때 먹은 마음을 잃지 않았다.그 덕분에 친구들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는 물론, 한국 예절도 인석한테 익혔으며,한국 라면과 김밥도 인석이 가르쳐 주었다. 말하자면 인석은 핀란드에서 한류(韓..
2024.09.26 -
배구선수 김인석 9
신혼여행 후4박 5일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후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전통시장에 다녀온 인석.가는 곳마다 인석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한편으로는 자랑스러웠으나 한편으로는 곤란했다.어머니께 쏟아지는 칭찬 속에서 시장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같이 다니던 경문은 자랑스러웠다.이런 친구가 배구에서 공을 세우고 큰일을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인석이 가는 곳마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이 기뻐하셨다.“아이구, 인석이 엄마 좋으시겠네!”“인석이 키 큰 것 좀 봐! 우리 아들도 이렇게 컸으면 좋겠네!”“인석이 신부 좀 봐, 예쁘기도 하지!”“인석이 선친께서 살아계셨다면 얼마나 기쁘실까?”돌아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사고, 필요한 것도 사는 인석. 어머니, 신부, 경문은 그런 인석이 자랑스러웠고,인석에게는 이 광경이 선거..
2024.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