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이의 행복(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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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석이의 행복 19(마지막회)
에필로그우리는 환경을 소중히 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우리가 되자.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도 할 말이 생길 것 아닌가.지구 환경을 소중히 함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지구를 소중히 아껴주자.우리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이것뿐이다. 주인공 현석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모두의 사랑과 관심으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모두가 알아야 할, 그리고 반성해야 할 모두의 자화상이다.
2024.09.10 -
현석이의 행복 18
100세 이후102세의 나이까지 농사꾼으로 활동한 현석. 하지만 그도 자연의 법칙만은 어길 수 없어 흰머리가 늘었다.장남 선혁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환경운동과 남극 보호운동, 북극곰 보호운동에서 활동했고,차남 선길은 네덜란드, 벨기에, 핀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돌아다니며 대사직을 역임했고,막내딸 선미는 환경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북마리아나제도에 가서 활약했다.그렇게 자식들이 환경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여 흡족한 현석. 말년에는 가평의 어느 교회에 등록한 그는기도로 나날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끝내 쓰러졌다. 2122년 4월 15일,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모두 수고했다. 나는 너희 세 명의 어머니와 너희 조부모님 곁으로 간다.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고,유산은 모두 기부하도록 해라. 나는 천국에서 너희들을..
2024.09.10 -
현석이의 행복 17
아내를 여의고87세에 아내를 여읜 현석은 홀로 남았다. 자식들도 손자들도 국민배당금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현석은 89세의 노익장에도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여 2102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그리고 90세의 나이에도 회고록을 썼다. 회고록의 이름은 《통일 이후 한국살이》였다.이 회고록에서 현석은 이렇게 밝혔다. 만일 내가 부모님을 잘못 만났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받고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헬조선’에서 ‘세계강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라던 지상낙원이었다.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주변과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부모는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고,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며바른 학문과 배양된 체력, 실력을 가지고 사회..
2024.09.09 -
현석이의 행복 16
세월이 흘러어느덧 세월은 흘러 현석도 75세가 되었다. 현석이 정년퇴직 후 6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현석도 나이가 들었다.자식들도 결혼하여 나이가 든 현석 부부는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아내가 너무나도 나이가 들어 관절염에 심장병이 겹쳤다. 하지만 자식들이 병원에서 관절 수술을 해서 완쾌되었다.
2024.09.08 -
현석이의 행복 15
아버지의 임종2047년 11월 4일, 막내딸 선미가 태어났다. 큰오빠 선혁은 초등학교 2학년, 작은오빠 선길이는 5살이었다.그 때,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전보가 날아왔다. 그래서 아내를 데리고 아버지의 병원으로 갔더니,급성 복막염이란다. 의사가,“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이미 혈관까지 전이됐습니다.”이 말에 통곡하는 어머니와 기도하는 목사님. 아버지의 임종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마지막으로……, 아기를, 안아보고 싶구나….”그 말을 들은 현석은 막내딸을 아버지의 곁에 두었으나, 팔에 힘이 없어,“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 앞으로도 사이좋게 지내도록 해라…. 내 재산의 일부는 사회에 기증해라.남은 삶을 값지게 채우는, 그것이 바른 행동이다…….”이 말을 남기고 현석의 아버..
2024.09.08 -
현석이의 행복 14
근면과 성실하지만, 그렇다고 통일 한국 국민은 게으른 상태로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공짜를 좋아했던 나우루와 베네수엘라의 몰락을 잘 보았기 때문이었다.원래부터가 근면하고 성실한 대한민국 국민이었기에, 일손이 모자란 곳에 가서 일을 도와주고,재난 피해주민, 이재민, 소년소녀가장, 독거노인, 실업자, 저소득층, 불우이웃 등을 도와주며 구제를 해주고,학교폭력이라든가 학교 일진이든 조폭이든 인신매매든 동네 불량배든 소매치기든 힘을 합쳐서,자경단 비슷한 단체를 만들어 응징하였다. 또한 교통법규를 잘 지켰으며,폭주족이라든지 뺑소니라든지 납치라든지 대형트럭 등으로 교통사고가 났다 하면 시민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또, 스포츠를 통해 신체와 정신을 단련하고, 스포츠 경기가 열렸다 하면 그 곳에 가서 응원을 열정적으로 했..
2024.09.06 -
현석이의 행복 13
생일날의 기적2045년 3월 31일, 성재(醒齋) 장현석의 32세 생일날이었다. ‘딩동’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와 보니,대통령이 생일케이크와 축하금 10만원, 선물까지 준 것이었다. 생일케이크 배달부에게,“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십니다.”이랬더니,“제가 더 고맙습니다.”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대통령이 관혼상제까지 챙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지금까지 관혼상제는 개인이 스스로 챙길 수밖에 없었지만, 새 대통령이 시시콜콜 책임을 지고 다 해주니고마운 한편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개개인이 세금을 스스로 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세금 포인트가 차곡차곡 쌓였는데,그 세금 포인트로 신용이 회복되고 새 사업을 할 수 있으며, 죽으면 위로금에 국립묘지에 묻히니나라가 관혼상제와 취업, 교육까지 다 책임져 주는 시대가 온..
202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