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6. 20. 23:59ㆍ나의 이야기
소설
그늘 속에서 벗어나
堂井 김장수
아빠와 할머니만 옆에 있으면
동암(桐菴) 주현민, 2011년 5월 4일생 서울생. 고향은 서울특별시 강서구 화곡동. 어릴 적에는 부모님 덕에 참 행복했으나 5살 때부터 시련이 찾아왔다. 엄마가 오랜 시간 위암으로 투병하다가 현민이가 8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빠는 아내를 잃고 매일 술과 눈물로 지새우긴 했으나, 9살 때 가까스로 그 트라우마를 극복했고, 지금은 아빠가 현민이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팔순을 넘긴 현민이 할머니도 아들과 손자의 효도로 많이 좋아지셨다. 아빠도 현민이의 효도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픈 게 제일 싫어요.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는 내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빠도 그렇고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아빠와 노인수당 70만원(수급비의 후신)과 1인당 국민배당금 150만원 덕분에 할머니는 아빠가 일하러 가실 동안 요양을 하시고 현민이는 학교에 갔다 온다. 빨래와 식사 준비는 할머니 몫이지만 이따금씩 아빠와 현민이가 돕는다. 그 상황에서 현민이에게 선천적 장애와 큰 희귀병이 결코 찾아오지 않은 것도 기적이었다. 현민이 나이 11살 때, 아버지는 새엄마와 결혼했다. 새엄마는 현민이를 보자,
“참 귀엽네. 앞으로도 잘 해줄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빠의 새 출발
어느덧 집도 새롭게 장만했고, 갓 결혼한 새엄마도 현민이를 잘 돌봐 주셨다. 아빠와 새엄마 사이에는 1남 2녀의 세 동생도 태어났다. 그렇게 살림은 안정되었고, 새엄마도 현민이를 잘 돌봐 주시니, 어느새 현민이는 외교관을 꿈꾸기 시작했다. 동생들도 각자의 꿈을 꾸게 되었으며, 현민이는 6학년 때 초등학교 선생님에게 자신이 외교관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선 크게 칭찬을 하신다.
“참 잘되었구나! 외교관이 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
“예. 열심히 공부할게요.”
“그래. 현민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이제는 외교관이 되려면 영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해.”
“걱정 마세요.”
그렇게 현민이는 외교관이 되는 것을 꿈꾸며 열심히 공부한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그 시각이면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할 나이였지만, 현민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괴롭힘과 왕따 같은 건 옛날 이야기였다. 친구들도 현민이를 잘 돌봐주니, 현민이는 안심하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위기, 그리고 기회
중학교 1학년 때 시련이 찾아왔다. 친구 하나가 현민이의 돈지갑을 훔쳐간 것이었다. 이 일로 교실은 발칵 뒤집혔다. 그러나 그건 오래 가지 않았다. 범인이 떨어뜨린 현민이의 돈지갑을 어떤 친구가 찾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상포(霜蒲) 오기선. 기선이는 범인이 떨어뜨린 현민이의 돈지갑을 찾아주었는데, 기선이는 공부도 잘 하는데다 선도부 활동을 하고 있어서 손쉽게 그 지갑을 찾아준 것이었다. 현민이는,
“기선아, 고마워.”
라고 고마움을 표현했으나, 기선이는 멋쩍은 표정으로,
“괜찮아.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
라고 하며 오히려 현민이를 위로해 주는 것이었다. 참, 범인은 얼마 후 붙잡혀 정신교육대로 연행되었다.
중학교 졸업, 그리고 통일
현민이와 기선이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현민이는 공항고등학교로, 기선이는 농구를 좋아해 용산고등학교로 가서, 기선이는 그 후 훌륭한 농구선수가 되어 통일 한국 농구선수가 되어 금메달을 땄다.
2027년 3월 1일 오전 9시, 드디어 북한에 자유가 찾아왔다. 통일이 된 것이다. 79년 분단의 역사가 막을 내리고 북한의 내각이 해체되어 북한 주민들에게도 자유와 인권이 주어져서, 북한의 모든 것은 철저히 청산, 개혁하였으며, 핵무기도 폐기되었고, 모든 선전물도 없어져 북한 주민들은 자유와 인권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통일 한국은 새롭게 거듭났다. 통일 한국은 북한이 저지른 인권 침해 등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치되, 그들을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어 북한 주민들의 인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마약 시장도 뿌리를 뽑았다. 그리고 이산가족들도 서로 만나게 되어 통일 한국은 옛날처럼 하나가 되었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어도, 통일 한국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여 옛날보다 더 강해졌다. 시련을 견디는 겨울나무처럼 말이다.
새로운 우리나라
통일이 되니 영토도 넓어지고 인구가 많아져 8천만 명이나 되었다. 풍부한 내수시장, 경제성장, 북한의 제재 해제, 저출산 고령화 문제의 해결, 북한의 풍부한 자원과 남한의 기술이 힘을 합쳐 경제 강국 건설, 체육 분야에서도 제재가 풀려 2028 LA 올림픽 때는 금메달을 따는 북한 사람이 속출하여 남북이 함께 금메달을 따게 되었다. 또 관광 자원도 친환경으로 건설하였고, 물류 분야에서도 발전을 하게 되었으며, 한반도 전체가 하나가 되어 육(陸), 해(海), 공(空) 전국에서 전 세계로 수출을 하게 되었다. 또한 철도 분야의 눈부신 발전은 통일 한국에 도약의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면 교통비, 물가 안정, 원자재 가격 안정으로 서민들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또 분단 비용이 절약되어 복지와 교육에도 쓰임을 얻게 되었다. 과거에는 비싼 등록금 때문에 빚이 늘었었는데, 이제 통일 한국에서는 인재들이 많이 나오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솔로몬제도, 부건빌 섬, 핏케언제도, 키리바시, 쿡제도, 토켈라우 제도, 왈리스퓌튀나, 사모아, 아메리칸 사모아, 통가, 니우에, 투발루, 나우루, 팔라우, 마셜 제도, 미크로네시아 이외에도 일본, 파푸아뉴기니, 피지, 북 마리아나 제도, 괌, 사이판 등에도 영향력을 유지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신문에서 보는 현민이는,
“우리나라가 그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 기쁘구나. 나도 공부나 열심히 해야겠다.”
라고 말하며 통일 한국의 출범을 축하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이제 마음 놓고 공부만 해.”
하시며 현민이를 격려해 주신다. 할머니는,
“예쁜 강아지, 할미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 테니 공부 열심히 하렴.”
라고 하시며 손자를 격려해 주신다. 새엄마와 이복동생들이 격려해 주심은 말할 나위도 없다. 2027년 7월 16일의 일이었다. 현민이가 16세 때,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KTX의 확산
2004년 4월 1일에는 경부고속철도가 개통되어 서울~광명~천안아산~대전~김천(구미)~동대구~신경주~울산~부산 구간이 전부였으나, 차츰 호남고속철도, 수서고속철도, 경부선, 호남선, 전라선, 경전선 밀양~진주 구간, 이제는 중앙선, 경강선, 중부내륙선, 경원선, 동서고속철도 이외에도 북한에도 다니게 되었다. 2027년 현재는 행신에서 개성, 평양, 신의주, 원산, 청진, 나진, 혜산을 거쳐 중국, 러시아, 유럽에도 KTX가 다니게 되었다. 또한 항공 산업은 서울국제공항(인천국제공항의 후신)과 평양 순안 주기철 국제공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다. 부산항, 장전항, 인천항, 군산항, 광양항, 원산항, 흥남부두, 나진항, 목포항 등은 해양 물류 발전의 기지가 되었으며, 남극 개발에서도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현민이의 대학 입학, 그리고 졸업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현민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분야는 바로 외국어였다. 영어·중국어·일본어 이외에도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네덜란드어, 독일어, 아랍어 등도 열심히 익혔다. 지금은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외국어를 익히느라 군대에 갈 겨를도 없었는데, 대학 3학년 때 한 달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곧장 제대했다. - 현민이가 군대에 갔을 때,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전환되었다. - 그 후 4학년이 되어도 성적 문제와 군사훈련 문제로 슬럼프를 겪다가,
“현민 군, 힘내 봐요. 조금만 더 참으면 좋은 세상이 올 테니까. 현민 군에게는 외교관이 되고 싶은 꿈이 있으니까 열심히 해요.”
한 독일어 교수님이 현민에게 격려를 해 준다. 그 격려로 7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그 때의 대학에서는 입학이 쉬워도 졸업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과거 수능을 통해 대학에 입학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현민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통일 한국이 과거의 대한민국의 악습에서 탈피하여 미래의 강국으로 도약하는 순간이었다.
외교관으로서
얼마 후 현민은 통일 한국 외교부의 말단 인턴으로 취업했다. 2036년 4월 11일, 현민의 나이 25세의 일이었다. 현민은 일단 취업을 했다 해도 공부와 인턴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얼마 후 현민은 주 트리니다드토바고 한국 대사관 직원으로 발령이 났다. 그렇게 현민의 외교관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현민은 트리니다드토바고에서 영어 이외에도 힌디어를 익혔었는데, 그 이유는 현지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여 통일 한국의 국정에도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현민은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대통령에게 인정을 받아 그 나라의 표창을 받았다. 그 후에는 50여명의 한국 교민들에게 축하를 받았는데, 이북에서 온 사람도 있었다. 현민은 속으로는 겁을 먹었으나, 그건 기우(杞憂)였다. 이북에서 온 사람의 이름은 운암(雲巖) 김철민인데, 축하식에서 현민과 금방 친해졌다. 203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철민이 갑자기,
“현민이 자네는 일처리를 잘 하는 것 같아. 그런데 자네, 결혼은 언제 할 텐가?”
“글쎄…. 때가 되면 하겠지. 지금은 아직 생각이 없네.”
“내래 좋은 신붓감 하나 골라 줄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나는 행실이 착한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
이 말에 철민은 껄껄 웃더니,
“알았네. 자네 같은 사람은 세상에 흔치 않아. 자네라면 해낼 기야.”
“고마우이. 나 같은 사람을 걱정해 주어서 말일세.”
“사람 참…. 빨리 결혼 준비나 하시게. 결혼은 우리가 주선해 줄 테니까.”
“정말 자네는 참 착한 사람이로군.”
결혼, 그리고 차드로
2040년 3월 2일, 현민의 나이 29세. 현지 예배당에서 3살 어린 조영숙과 결혼한 후 그 나라에서 4년을 더 머물렀다. 그 후 철민 가족과 함께 차드로 떠난 현민은 트리니다드 토바고 사람들의 아쉬운 배웅 속에서 차드로 떠났다.
처음 차드에 입국 이후 여러 가지 장애에 부딪혔지만, 차츰 마음을 여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3년 후인 2047년 2월 12일, 주 카메룬 한국 대사관의 도움으로 식목일 행사를 열었다. 다행히 많은 차드 주민들이 참여해 주었고, 무슬림, 크리스천 등이 종교를 초월하여 현민에게 협조를 하는 바람에 차드에도 새마을운동이 일어나 차드 호가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아갔다. 물론 차드에 새마을운동이 일어난 이유는 통일 한국에서 지원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차드에 새마을 운동이 일어난 지 5년인 2052년, 차드호는 옛날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고, 차드에도 숲이 우거지게 되었으며, 물도 흐르게 되었다. 역시 환경은 보살피고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주나 보다.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사업인가를 이 사건을 계기로 모두 깨닫게 되었다. 차드에도 각지에서 학교가 세워지고, 배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 늘어서 차드는 친환경 국가로 다시 거듭나게 되었다.
현민의 아이들
2042년 1월 14일에는 장남 고송(孤松) 주덕무가 태어났는데, 장래희망이 의사였다. 트리니다드 시절 낳은 아이인데, 부친을 닮아 똑똑했고, 태권도도 잘 했다. 하지만 태권도는 재미로 익혔고, 34세에 의사가 되어 부친 대신 차드에서 의사로 활약했다. 그 후 김철민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일생을 차드 국민을 위해 헌신했다. 덕분에 영유아 사망률을 0%로 낮추었다.
차남 현송(玄松) 주현무가 태어났는데, 2045년 10월 1일생이었다.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났는데, 7세에 은자메나에 있는 기독교 유치원에서 글을 배우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기계 수리공이 되었다. 그 후 각종 기계와 컴퓨터를 고쳐 주면서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차드의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었다. 그 착한 마음에 반한 아가씨는 차드에서 사는 기독교인이었는데, 방열 풍력 발전기를 설치하는 현무의 착한 마음씨에 감탄하여, 현무와 연애 2년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현무는 그 이후 차드 은자메나의 어느 시장에 기계 수리 상점을 차렸다. 워낙 잘 고쳐서 차드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또한 현무는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 해서 마음도 착하고 자선도 베풀 줄 알았다. 그 후 현송 주현무는 차드의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 차드의 국민들을 위하여 헌신해 왔고, 차드를 산유국으로 올렸고, OPEC에 가입시켰다. 주현무 대통령의 노력으로 차드는 아프리카의 중견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3남 가송(嘉松) 주영무는 2048년 3월 13일에 태어났는데, 차드 은자메나에서 태어났다. 주영무는 태권도를 잘 하여 차드 국가대표로 금메달을 땄다. 그 후 차드의 사막화 방지에 크게 이바지하여, 28세에 차드 환경부를 신설해 초대 장관이 되었다. 영무는 25살에 차드 기독교인과 결혼했는데, 전통 농업을 전면 금지시켰고, 형들을 도와 새마을운동을 차드 전체에 보급했다. 훗날 차드가 중견 국가가 되었을 때,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리비아, 카메룬, 수단 등에도 퍼졌다. 또한 주영무는 차드 전체에 의료, 무역, 경제, 환경 등을 보급하여 가르치는 등 사막화 방지와 환경보호에도 크게 기여했다. 2103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슬하에 4남 1녀가 있다.
4남 노송(老松) 주윤무는 2050년 2월 27일에 차드에서 태어났는데, 고졸 후 서울 대학에 유학하여 환경학과에 진학했다. 졸업 후 재활용 공장에 취업, 쓰레기 재활용 기술을 익히고, 쓰레기 매립이 사라진 통일 한국에서 여러 가지 쓰레기 재활용뿐만 아니라 재활용이 된 원료를 생활용품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또한 서해의 석유 개발과 서해 금광 개발, 방사능 물질 정화(淨化)에 힘을 기울여, 2100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또한 친환경 발전 – 수소, 바이오매스, 연료 전지 발전, 해양 온도차 발전, 조력 및 파력, 핵융합, 풍력, 태양열 발전, 지열 등과 에너지 절약을 전 세계에 보급했다. 아내는 여류 과학자였고, 슬하에 2남 2녀가 있다.
막내딸 주현경은 2052년 1월 3일에 은자메나에서 태어나 차드에서 중학교까지 다니다가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 오기선의 막내아들인 효석(曉石) 오세영에게 시집갔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차드에서 리비아로
아이들이 차드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보면, 한국인은 어딜 가든 슬기로운 민족임을 자랑할 만도 했다. 하지만 주현민은 차드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2052년 3월 3일, 주현민은 아내와 아이들을 차드에 남겨 두고, 홀로 리비아로 떠났다. 리비아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든 환영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옛날에 리비아에 대수로를 만드는 데 노력한 동아건설 덕분에 한국의 이미지가 많이 좋아진 때문일 거다. 아무튼 리비아에서 큰 환영을 받은 현민은 카다피가 못 다한 리비아 대수로를 만드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 한국의 건설회사들과 협력하여 리비아 대수로가 단 5년만에 공사를 완료하였으므로, 리비아 정부에서는 동암 주현민에게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덕분에 리비아와 차드가 다시 국교(國交)를 복원했음은 당연했다. 주현민이 멀고 먼 한국에서 찾아와 큰일을 해냈으니 그러할 만도 했다. 덕분에 리비아는 농업 국가가 되었고, 차드도 마찬가지였다. 두 나라 다 새마을운동을 합법화하여 잘 사는 나라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 물론 한국은 10여년 만에 경제발전을 해낸 국가가 되었으니 말은 다 했을지도.
리비아의 군주제 부활
사누시 가문이 드디어 리비아에 군주제를 부활시켰다. - 이건 아프가니스탄이나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이란도 마찬가지였다. - 리비아 군주제의 부활로 다시 옛날처럼 돌아가는가 했으나, 다행히 사누시 왕조는 리비아에 행복과 물을 안겨준 주현민에게 호감을 품고 있었다. 2061년 11월 3일, 리비아는 군주제 국가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리비아에서 할 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한 주현민은 차드에서 가족들을 다시 만났다. 이후 3개월 동안 차드와 리비아를 오고 가면서 환경보호에 힘을 기울였다. 차드와 리비아의 변화를 보고 다른 아랍 국가들도 환경보호에 노력하게 되었다. 미국도 지나친 낭비를 자제하고 환경보호와 기후난민 보호에도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플라스틱 재활용
플라스틱 쓰레기는 오랜 세월 동안 전 세계의 골칫거리였다. 하지만 플라스틱 쓰레기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와 재활용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으니 태평양에 떠오른 ‘쓰레기 섬’ 같은 말은 이제 환경동화 속에서나 나오는 말이 되었다. 또한 지구촌이 자각(自覺)하여 환경보호와 쓰레기 재활용, 쓰레기 줍기, 금연절주, 재활용 물품 자원화, 중고 가전제품과 안 먹을 음식물 아프리카에 보내기, 미생물 플라스틱 제조 등 별의별 환경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제 지구에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면 싱가포르처럼 벌금을 내게 됨은 말할 나위도 없다.
UN 총회에서 연설하다
그 후 주현민은 판문점 UN 총회에서,
“쓰레기를 재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세계인 여러분이 힘을 합친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괴물이 됩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악들이 과거에 멸종된 공룡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세계 인류가 다함께 힘을 합친다면 후손들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지구를 물려줄 수도 있습니다. 지구의 운명은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자연보호와 환경보호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쓰레기 재활용과 환경보호, 무분별한 개발 방지에 힘을 보태 주십시오. 자기 나라만의 이익이 아니라 지구와 모두의 이익을 중시하는 우리 인류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발언이 전 세계 신문에 대서특필되자 지구인들은 ‘환경보호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지만 주현민은
‘변하는 건 그때뿐 옛날 버릇이 또 나오지는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희망만은 버리지 않았다. 전 인류가 자신들을 알아주리라는 믿음이었다. 옛날 중국은 공산당의 힘으로 중국을 쇠퇴시키고,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인 탓에 여러 혼란 끝에 민주화된 지 오래였다. 통일 한국이 정치, 경제, 문화, 스포츠, 환경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한 지도 꽤 되었다.
가족들과의 상봉
2068년 3월 13일, 동암 주현민은 차드에서 가족들과 만났다. 어느새 아내도 나이가 들었고, 장남 고송 주덕무는 26세, 차남 현송 주현무는 23세, 3남 가송 주영무는 20세, 4남 노송 주윤무는 18세, 막내딸 주현경은 16세였다. 다섯 아이들은 이미 차드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우등생으로 소문나 있었고, 공부를 잘 할 뿐만 아니라 마음이 착해서 ‘역시 한국 학생은 다르구나’라는 인식을 모두의 가슴에 심어 주었다. 장남 덕무는 카메룬의 의학대학을 졸업해 의사 면허를 따서 차드의 아이들에게 인술(仁術)을 베풀고 있었고, 차남 현무는 차드에서 환경보호단체를 만들었으며, 그린피스 회원이었다. 3남 영무는 차드 대학교 2학년인데, 환경 동아리를 만들어 회장이 되었다. 4남 윤무는 고등학교 3학년, 막내딸 현경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이 중 4남 윤무와 막내 현경은 한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아버지, 저는 한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어요. 차드의 형편은 형들이 잘 하고 있어서 괜찮아요. 한국의 잘못된 점만큼은 보완하고 싶어요.”
“아빠, 나 한국에 가고 싶어요. 차드 사람들은 마음은 착하지만 오빠들이 잘 하고 있으니까, 한국에 가면 잘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 말에 곰곰이 생각해 보는 아빠 현민. 그리고 얼마 후,
“알았다. 아빠도 한국이 그리웠다. 당장 대사관에 허락을 받자. 덕무야, 네 생각은 어떠냐?”
“저와 현무와 영무는 차드에 남을게요. 윤무랑 현경이랑 다녀오세요.”
“다 같이 가고 싶었는데, 다들 바쁘다니 할 수 없구나.”
“당신이 한국에 가고 싶다면 저도 가죠.”
다음날(2068년 3월 14일), 주현민 부부는 대사관에 허락을 받고, 차드 핫산 은자메나 국제공항을 통해 파리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도착, 곧바로 우리 여객기를 타고 서울국제공항으로 갔다. 그 당시 윤무와 현경이가 동행했다.
한국에서는
“주현민 선생이 차드에서 돌아온대요.”
이 말에 화곡동이 발칵 뒤집히는 건 예사였고,
“서울 화곡동에서 이런 인재가 배출되었다는 건 우리 동네의 영광이자 자랑입니다.”
한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는 현민이 오면 명예 석사 학위와 명예박사 학위를 주겠다고 하였고, 대통령이 훈장을 주겠다고 준비 중이었다. 몇 시간 후 주현민 가족이 서울국제공항에 도착하자, 과학자들과 기자들이 마중을 나왔다.
“주현민 선생님, 잘 돌아오셨습니다!”
“차드에서 일하시면서 힘든 건 없으십니까?”
그 말에 주현민은,
“나는 차드 국민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냥 차드 국민들이 우리나라 국민처럼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그 말을 하고 나서 공항을 빠져나오자, 서울국제공항에 마중나온 시민들은,
“주현민 박사 만세!”
“대한민국 만세!”
“만세! 만세! 만만세……!”
인천 영종도를 뒤덮은 만세 소리는 하늘에 닿을 듯했다. 고향인 화곡동까지 축하의 경적 소리가 이어졌고, 공항고등학교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명예롭게 돌아온 주현민을 환영하느라 난리였고, 급기야 학생들을 위한 사인회도 벌어졌다. 사인회가 끝난 후 화곡동까지 카퍼레이드가 이어졌으며, 제일 먼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을 찾아왔는데, 선생님은 남편과 사별 후 막내아들 내외와 같이 살고 계셨다. 벌써 85세인 선생님을 만나서 보니 흰머리가 많아지시고 주름투성이였다. 주현민이 알고 있던 예쁜 선생님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사제간의 정은 변함이 없었다. 선생님께서는,
“잘 돌아왔다. 네가 해낼 줄 알았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현민은,
“선생님, 모두 선생님 덕분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인사를 드리고 곧바로 집에 도착해 보니, 할머니와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연로하신데도 현민을 반겨주셨다.
“할머니,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오, 훌륭하구나!”
“잘 돌아왔다, 내 아들아!”
“어서 오너라. 배고프지?”
그렇게 백열둘 살이 넘은 할머니와 팔순을 넘긴 아버지, 칠순의 새어머니, 낼모레 60살의 아들…. 네 사람은 더 이상 할 말이 막힌 채 감격스러움에 눈물을 흘렸다. 보는 사람들이 지켜보니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온 동네가 기쁨에 젖어 ‘그 곳에 올라’, ‘얼음꽃’이 울려 퍼졌다. 지켜보는 윤무와 현경이는 감회에 젖었다.
마지막 효도
그리운 고향 산천의 품에 안겨 어릴 적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현민은 많은 생각을 했다. 남북이 힘을 합쳐 잘 살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중국이 여러 나라로 갈라져버렸다는 소식과, 신 중국연방이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한편,
“그래, 이 아이들이 네 아이들이냐?”
“예. 첫째와 둘째와 셋째는 공부 때문에 못 왔습니다. 이 가족사진이라도 보십시오.”
“어디 보자.”
그 가족사진을 본 할머니와 아버지는,
“참 잘생겼구나. 같이 왔다면 좋았을걸.”
“차드에서 어떻게 지냈느냐? 거기는 사막화가 심각하다던데….”
“나무를 적당히 심고, 오아시스에서 물을 길어오니, 아무 걱정 없습니다.”
“차드는 참 먼 나라구나.”
“우리 손주가 고생하는구나. 할미는 늘 네가 보고 싶었단다.”
“이삼년 후에는 꼭 돌아오겠습니다.”
현민은 이렇게 약속했다. 할머니, 아버지, 새어머니, 이복동생들도 감회에 젖었다. 이복동생들도 각자 가정을 만들었다.
동네잔치
얼마 후 현민은 화곡동 주민들이 주최한 동네잔치에 참석했다. 현민이 가족은 이 잔치를 즐기면서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환경에 대한 강연이 있었을 때, 현민은,
“‘자연은 후손들에게 빌린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한국의 자연과 환경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자원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친환경 산업이 한국이 살 길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후세들을 실망시키면 용서하지 않겠다’라고요. 우리는 후손들을 위하여 자연을 보호하고 환경을 보호해야 합니다. 하지만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철저히,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이 나라가 살 수 있습니다.”
라는 강연을 했을 때 참석했던 모두가 박수를 쳤다. 2068년 3월 31일, 현민은 차드에서의 환경보호 공적으로 통일 한국 최고 공로 훈장을 받게 되었다. 현민은 이 훈장을 모두에게 보여주며,
“이건 모두의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훈장을 할머니와 아버지께 보여드리며 현민은 싱글벙글했다. 할머니는,
‘소년가장이었던 아이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었구나, 영감, 잘 보고 계시지요?’
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여보, 보고 있소? 우리 아들이 훈장을 탔소.’
이런 생각을 하며 먼저 떠난 부인을 생각했다.
차드로 돌아가다
이번에 차드에서 새마을운동을 선도하게 된 현민은 어느새 차드를 푸른 숲이 우거지고, 농업이 발달하고, 물이 가득한 나라가 되었는데, 2068년 10월에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그 해 12월 10일에 상장과 상금, 금메달을 받았다. 한편, 고국에 있는 할머니는 병석에서,
“참 잘 되었구나.”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소에는 건강했던 할머니였으나, 쉽게 낫기 어려운 병에 걸렸다. 할머니의 체력으로는 그 병을 이겨낼 힘이 없었다. 집안사람들과 목사님, 아버지가 정성껏 돌봐 드렸으나, 2069년 1월 1일 새벽 4시, 결국 103세의 나이로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이 슬픈 소식이 은자메나에 있는 현민에게도 전해졌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다니…. 믿겨지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말이 끝나기 전에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어머니가 어릴 적 돌아가시고, 할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 혼자 살아가실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이제 할머니는 천국에 있고, 이 세상에 없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기를,
‘할머니, 할머니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제 훌륭한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아무쪼록 천국에서 만나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를 드렸다.
주윤무의 졸업식
2069년 2월 12일, 넷째 아들 주윤무의 졸업식이 은자메나의 한 고등학교에서 있었다. 이 경사스러운 소식이 부친인 동암 주현민에게 전해졌다. 졸업식에 참석한 현민은,
“인제 어떻게 할 거니?”
“아버지, 저는 한국으로 가고 싶어요.”
“그래라. 그러나 빗나간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하고 난 후, 서울 대학과 한국에서 해야 할 행동, 예절 등을 윤무와 현경에게 상세히 가르쳐 주고, 공항까지 배웅을 하고 난 후, 81세의 아버지께 국제전화를 했다.
“아버지, 저 공항입니다.”
“오, 현민이구나! 어쩐 일이냐?”
“윤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온다 하고, 현경이도 곧 한국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니까, 제 자식들을 잘 부탁합니다.”
“오냐, 걱정 마라. 네 아이들은 무사히 아껴 주고, 공부 열심히 하도록 도울 테니 걱정 말거라.”
팔순을 넘긴 아버지
노송 주윤무와 주현경은 그 후 81세의 할아버지, 할머니 밑에서 서울 대학에 입학했고, 환경학과에 진학한 윤무는 재활용 기술과 쓰레기 처리 기술을 익히면서 환경보호와 자원개발도 배웠다. 대학을 다닐 때 A+ 학점을 놓친 적이 없었다. 현경은 한국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상포 오기선의 막내아들 효석 오세영과 연인 사이가 되었고, 넷째 오빠 윤무가 대학에 4년만에 졸업하자, 오세영과 결혼식을 올렸다. 부모님인 현민은 이 결혼에 참석하여 축하를 해 주었다. 오기선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기선이의 착한 행동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다. 오기선은 이미 어느 농구단의 감독이 되어 있었다. 윤무도 여류 과학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윤무의 결혼 후 3개월 후에 현민의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졌다. 새어머니와 동생들, 주윤무 부부와 오세영 부부가 돌봐주었으나, 건강했던 아버지는 세월의 흐름만은 거역할 수 없었는지 심장병에 걸렸다. 그 후 4개월 만에 아버지는,
환경 과학자가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라고 현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후 사흘 후, 아버지마저 할머니의 뒤를 따라가고 말았다. 향년 82세. 현선의 새어머니는 좋은 어머니였다. 고인이 된 아버지 곁을 지켜준 착한 여자였다. 장례가 끝난 후에는 90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이복동생들도 각자 갈 길을 갔다.
할머니 곁으로
세월은 흘러 2094년 3월 4일,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급히 병원으로 가 보니, 심근경색이었다. 한때 가슴이 가끔 아플 때, 치료를 받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그 후, 가족들을 모아 유언을 남긴다.
“돈과 관련 없이 사이좋게 지내라. 돈이 전부는 아니다. 지구의 환경을 잘 부탁한다.”
향년 83세. 3월 6일에 세상을 떠난 동암 주현민. 그렇게 착하셨던 할머니 곁으로 가게 되어 후회는 없었다. 시신은 차드에 운구되었다. 차드에 있는 은자메나 동쪽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함께 지구를 지켜야 한다. 후손들을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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