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의 굴레를 무릅쓰고

2014. 11. 4. 20:57나의 이야기

단편소설
조국의 굴레를 무릅쓰고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4학년 堂井 김장수
1986년 5월 5일, 남들은 어린이날에 들떠 있을 때, 어느 가난한 집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이름은 이동수.
동수는 가난한 집에서 신발장수 아버지와 행상 어머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동수를 낳던 도중 남편과 아들 둘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버지는 결국 새어머니를 맞게 되었다. 새어머니는 돈을 물 쓰듯 써대고 한 번도 가족을 생각할 의사 따위는 추호(秋毫)도 없었다.
부친과 새어머니 사이에서 딸 미래와 아들 경수가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새어머니와 미래와 경수만 위하고 전처의 자식들인 동수와 형 민수에게는 관심도 없었고,
심지어 동수와 민수 형제는 거지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어쩌다 설날에 세뱃돈을 받는 날이면 민수와 동수는 세뱃돈을 계모에게 빼앗기곤 했다.
동수와 민수는 어린 시절부터 부친과 계모를 미워했었고, 결국 친척집에서 살게 되었다. 하지만 부친과 계모는 민수와 동수를 학대하며 친척들로부터 돈을 뜯어갔다.
참다못한 동수네 문중(門中)은 부친과 계모를 족보에서 지웠다. 하지만 부모의 무례한 방문은 계속되었지만, 당시 동수 형제는 어렸기 때문에 보호받을 방법이 없었다.
“너희 둘이 고아원으로 가는 게 어떠냐? 나는 너희 부모 때문에 더는 견딜 수 없구나.”
“민수야, 동수야. 너희들은 문중의 희망이다. 그러니 고아원에 갔다 오면 된다. 잠깐이면 되니까 조금만 참으렴.”
“싫어요. 저는 할아버지랑 살래요. 고아원은 싫어요.”
“이건 너희 장래를 위해서야.”
결국 민수와 동수는 고아원에 보내지고 동수와 민수는 세상과 부모를 원망하며 6년 동안 참고 견딘다.
어느덧 중학교에 가게 된 민수와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동수에게 뜻밖의 시련이 닥쳐온다.
“오늘부터 민수와 동수는 문중의 제사를 지내야 한다. 학교 따위는 때려치우고 제사나 지내자.”
그렇게 민수와 동수는 학교를 그만두고 제사에 매달렸다. 민수는 그럭저럭 제사 환경에 적응하여 19세에 성인이 되어 어른이 된 이후에는 훈장이 되었고, 결국 동수와는 다른 길을 간다.
하지만 동수는 달랐다. 동수는 건축가가 되고 싶어했다. 하지만 17세에 할아버지한테 엄한 꾸중을 들어야 했다.
“너는 우리 문중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작정했느냐? 네 형을 봐라. 네 형은 제사 지내는 환경이 좋아서 의젓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뭐? 건축가가 되겠다고? 그 따위로 살 거면 이 집을 나가거라!”
동수는 결국 문중에서도 쫓겨나서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결국 기독교 대안학교에서 여러 가지 검정고시를 치른 후 대학에 입학한다.
대학교 건축학과에 다니면서 장학생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고학을 한 끝에 겨우 졸업했다.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졸업 후 건축사에 입사한 동수 앞에 부친과 계모가 나타나서,
“동수야, 부탁이다. 돈 좀 다오.”
“동수야, 이제라도 다 그만두고 공장일 좀 하렴. 부탁이야. 우리들은 교회에 다니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 부탁이야, 응?”
하지만 동수의 반응은 차갑다.
“민수 형과 저를 버리고 갔으면서 돈을 달라고요? 나는 당신들 같은 부모 둔 적도 없어! 나가!”
동수는 그렇게 냉정하게 대한다. 하지만 계모가 끈질기게 말하기를,
“건축업 따위 그만두고 교회에도 헌금하고, 공장 일 열심히 하고 예배도 드리면서….”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동수가 책상을 꽝 하고 친다.
“당신들은 내 가족 자격도 없어. 나에게는 당신 같은 가족 따위는 없었어. 내 인생 망쳐놓고 돈을 달라고? 경찰을 부르기 전에 나가! 꺼져 버려!”
“경찰? 흥!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우리 편이야. 우리 부모가 입만 뻥긋 하면 넌 끝이야. 좋은 말로 할 때 공장 일 알아보러 가자! 응?“
“싫다면 나를 죽이려 들겠지? 당장 나가!”
부모는 이를 갈면서 나간다.
“좋다. 후회하지 마라.”
그 후 3년, 카타르에서 건축업 설계를 맡던 동수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이동수 씨, 당장 귀국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가 보면 압니다.”
귀국 비행기를 탄 동수를 기다린 건, 경찰 형사들이었다.
“이동수 씨, 외환 관리법 위반으로 체포합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으며, 변명의 기회 있습니다.”
동수는 체포되어 시종일관(始終一貫) 보호받지 못한 채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다.
“제가 건축업을 좀 하겠다는데 이러한 판결을 내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신이 하면 부실 공사의 위험이 있고, 당신, 부모의 말을 거역했지?”
“나에게는 부모 같은 건 없어요. 나는 그들이 누군지도 모릅니다.”
“계속 이러면 출소 이후에도 불이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해고되었으니까.”
“이건 부당해고예요! 저는 억울합니다!”
“증인을 불러 드릴 테니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세요. 그럼.”
증인이 나타났다. 다름 아닌, 자신을 버린 부모와 목사님이 나타난 것이었다. 아버지가 한 말,
“동수야, 마지막으로 부탁한다. 애비의 말대로 공장 취직해서 마음을 잡자. 우리 모두의 행복을 위해서,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야.”
뒤이어 계모가 한 말,
“동수 너도 남들처럼 똑같이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하고,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부탁이야. 너도 이제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지. 안 그러니?”
하지만 경수의 반응은 차갑다.
“저는 당신들 같은 부모 둔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미 주님께 버림을 받은 몸이고, 저희 형제를 망친 당신들 따위, 부모로 생각하지 않겠습니다.”
부친이 이를 갈며 하는 말,
“너 언제 인간 될래?”
목사님이 그 대화에 끼어든다.
“이동수 형제님, 부탁이 있어요. 예배 열심히 나와요. 하나님 말씀에는 은혜와 성령이 있고, 공장 일 하면서 하나님 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거예요.
어때요?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천국 가는 것이?”
동수의 마음은 이미 닫힌 지 오래고, 동수는 이제 대한민국을 떠나기로 마음속으로 결심한다. 마지막 남긴 말,
“저는 당신들과 인연이 없습니다. 아무 인연도 아니고,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 따위는 필요가 없어요.
부모가 평소에 저희 형제를 잘 돌봤더라면 이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저에게는 부모도, 하나님도 없습니다. 저는 이민을 갈 겁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제 인생을 망쳐놓고 잘났다고 설치는 사람들과는 같이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수와 한국과의 인연은 끝난다. 나갈 때 목사님이 한 말씀,
“이동수 씨, 이제 당신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다시는 한국에서 살 생각 하지 마세요.”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동수는 출소 후 정부에 글을 보낸다. 자신을 도와주고 알아주면서, 자신이 꿈을 펼칠 수 있는 곳으로 가게 해 달라는 편지였다.
결국 정부는 동수의 청을 받아들였다. 다만,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다시는 한국에 오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해서 간 곳은 벨기에였다. 동수는 벨기에 국적을 취득한 후 한국 국적을 박탈당했다. 이제는 동수는 암흑의 긴 터널을 지나 빛이 넘치는 세계로 가게 된 것이다.
동수는 이제 기쁨과 꿈이 넘치는 곳에서 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벨기에의 유명한 건축회사에 취직하여 결혼도 하고, 완전히 조국과 인연을 끊었다.
그런 동수에게 처음으로 기쁜 소식이 들렸다. 동수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동수는 스웨덴으로 날아가 노벨상을 수령하고 소감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는 세계 지구촌 국민 여러분, 저 피에르(이동수의 벨기에 이름)는 사랑했던 조국, 대한민국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한국의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한 삶을 살았습니다.
과거에는 아버지와 계모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고아원 생활도 했습니다. 저는 건축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취직 이외에 어떠한 기회도 없고,
일자리 이외에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습니다. 그런 시스템에 숨이 막혀서, 저 자신에게 못 견딜 정도의 학대를 하는 나라, 저 같은 사람도 지켜주지 못하는 나라를 떠나서,
한국에는 없는, 어딘가에 있는 저의 행복을 찾아서 방황하다가 벨기에까지 온 겁니다.
존경하는 세계인 여러분, 저는 이제 이동수라는 이름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채 살아갈 겁니다. 앞으로는 저를 피에르 리라고 불러 주시고, 저를 건축가로 살게 보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제 조국의 굴레를 무릅쓰고 이 노벨상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세계인 여러분, 저는 이제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닙니다.
조국의 굴레를 벗어던진 저는 이제 완전한 벨기에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평생을 건축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한국에 없는 자신의 행복을 누렸다.
그 시각 한국에서는 동수의 부모가 처벌을 받았다는 뉴스가 전해져 내렸고, 동수는 이 소식을 듣자 기뻐했다.
“잘 된 일이야. 한국은 이제 혼이 나야 해. 차라리 잘 됐어.”
동수의 홈페이지에서는 동수를 질타하는 한국 네티즌의 댓글이 줄을 잇는다. ‘동수는 조국을 등진 배신자’, ‘동수는 가룟 유다보다 더 하다’ 등등이었다.
하지만 동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을 비판한 한국에 대한 미련을 버렸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 동수도 노인이 되었다. 동수는 병석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내가 죽거든 내 뼈를 벨기에 땅에 묻어 주시오. 후회는 없소. 벨기에에서 행복을 찾았고, 건축사업도 실컷 하게 되었으니까.
하나님, 저를 용서하시고, 천국에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동수의 나이 향년 87세. 동수의 일생 그렇게 행복한 날은 없었다. 동수는 안다. 대한민국의 앞날을 빛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동수는 브뤼셀 어느 묘지에 묻혔다. 동수는 후회도 없이 천국에서 살 것이다.
자신이 누리고 싶었던 행복을 한국이 아닌 벨기에에서 누릴 수 있었기에. 동수의 묘지 아래 햇살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동수, 아니 피에르의 묘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암흑 속에서 빛을 찾았다. 어딘가에 있을 행복 속에서 살다가 행복한 삶을 쟁취한 사람 여기 잠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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