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그늘 아래서 9

2024. 1. 13. 07:31소설 모음

세월이 흘러, 83세가 된 선강(仙江) 윤정식. 그는 이제 대한민국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정신까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자녀들과 손자들, 그리고 주민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가르치고,

어느덧 먼저 67세로 사별한 전처에게서 - 케냐 교포였다 - 8남 2녀를, 25세의 후처에게는 3남 4녀를 두었다.

그렇게 11남 6녀의 아버지가 된 선강 윤정식은 그 후 케냐의 시민권자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미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1. 첨단 과학이 발달하고 국민성은 단결과 근면으로 뭉쳐 있었다.

2. 남북통일 이후 북한에도 갈 수 있게 되었다.

3. 북한에도 아파트가 세워졌다.

4. 자신을 저주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없었다.

5. 대한민국을 전 세계가 축복하게 되었다.

6. 인구가 전에 비해 줄었다.

7. KTX가 신의주나 청진에 운행하게 되었다.

8. 정부에서 윤정식의 입국 제한을 철회했다.

9. 곳곳에서 새 빌딩 공사가 잇달았다.

10. 통일 이후 한국의 국민은 그를 환영했다. 취직을 준비하는 노인들은 특히 그를 환영했다.

11. 대한제국이 복권되어 대한민국은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어 있었다.

12. 곳곳에서 태극기가 나부끼고, 인천공항도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13. 곳곳에서 윤정식에게 용서와 관용, 배려를 베풀었다.

14. 통일 한국에 사는 외국인이 부쩍 늘었다.

15. 군주제 국가가 된 대한민국은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16. 각종 부패가 청산되고 일제 잔재가 청산되었다.

 

어떤 여행사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케냐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자신을 박대하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환영을 해 주었다. 선강 윤정식은 아내의 손을 잡고 한국의 관광지를 -

경복궁, 덕수궁, 민의회 국회의사당, 쇼핑몰, 백화점, 종묘, 탑골공원, 청계천, 부산 태종대, 광주 5·18 묘역,

해남 땅 끝 마을, 울릉도, 독도, 포스코, 간절곶, 여수 엑스포가 열렸던 곳, 지리산, 화엄사, 미륵사지 석탑,

대전 엑스포 공원, 그리고 고향인 경기도 평택 - 둘러보았다. 윤정식은 대한민국의 곳곳을 둘러보며 감회에 젖었다.

특히 고향 평택에서는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의 옛 친구들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변해버린 윤정식을 보며 놀란 표정들이었다. 한 친구의 한마디,

“자네 많이 변했구먼. 케냐에서 고생이 많았네그려.”

그의 말을 상기하며 윤정식은 생각했다.

‘저주받은 대한민국은 축복을 받아 이렇게 발전했구나. 하지만 인구가 줄면 큰일인데…….’

윤정식은 부모님의 묘소에도 참배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한국 입국이 금지되어 그는 결국 부모님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불효자식을 용서해 달라고 울며 빌었다.

평양으로 가는 KTX를 타고 그는 감회에 젖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너무나 변해버린 북한의 풍경에 말을 잊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 복선 전철화된 철도, 자유로운 분위기 등…. 그는 감격에 벅차 있었다.

평양 이스트 예루살렘 광장(구 김일성 광장)에 모인 군중들이 선강 윤정식의 연설을 듣기 위해 모였다.

그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존경하는 평양 주민 여러분,

저는 대한민국 국민이기를 포기했었습니다. 과거의 대한민국은 철저히 취업 중심, 스펙 중심, 돈 중심,

집안 중심의 폐쇄적인 구조에 집착하다 보니 국민을 노예로 만들었습니다.

원래 힘없는 국민은 국가가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었는데, 소위 ‘비국민’은 국가가 보기에는 테러리스트일 뿐이었고,

국가의 입장에 반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범죄자 취급을 해도 뭐라 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철저히 자유를 거부하며, 또한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대한민국을 파멸로 몰아넣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기억에서 과거의 대한민국은 없어졌습니다.

철저한 이기주의로 똘똘 뭉쳐 하느님의 법에 저항했던 한국인은 이미 다 죽고,

통일의 실현을 완수한 진짜 대한민국 국민만이 살아남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돌아왔습니다.

원래는 대한민국에서 추잡하게 늙어 가느니 다른 나라에서 곱게 사는 편을 택하겠노라 했었지만,

지금은 여러분의 뜻밖의 환대를 받고 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소원이 무엇이냐면,

케냐에서 살더라도 대한민국에 자주 놀러 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를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케냐에서 사는 동안 한국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한국에서는 저를 푸대접했습니다.

한국에서 개 노릇을 하느니 나라 없는 백성이 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노라 맹세하며 떠난 내 조국, 내 고향,

하지만 저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않겠노라 맹세했지만,

대한제국은 입헌 군주제로 독립되고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너무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저는 왕따였습니다.

학교에서 온갖 굴욕도 겪어 보았고, 입에 담기 어려운 욕도 많이 들었습니다.

일일이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도 부족합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왕따 가해자의 편이고 그들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친구라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낄낄대면서 저를 짓밟았죠. 하지만 다 지난 일입니다.

저는 더 이상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지만, 군주제 국가가 되기 전 대한민국은 이제 제 마음에 없습니다.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 대한민국, 정말 감사합니다.

대한민국 사람에게는 출산, 연애, 결혼, 꿈, 집, 인간관계, 희망, 육아도 범죄였지만,

이제는 상식이 되어 있으니 다행입니다. 존경하는 평양 주민 여러분, 존경하는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저를 용서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한국의 그늘 아래서 허송세월을 보냈던 선강 윤정식. 그는 이제 당당한 대한민국의 백성이 되었다.

이제는 그 어두운 그늘 속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은 것이다.

민주주의 입헌군주제 국가에서 이런 삶은 상상도 못 했지만,

윤정식은 이제 과거의 어두운 부분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한국을 축복하게 된 것이다.

케냐로 돌아간 윤정식은 122세로 죽을 때까지 1년에 한 번 대한민국에 놀러 갈 기회를 얻게 되었고,

대한민국 황제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저주받은 아이라고 쓰레기 취급을 받던 내가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윤정식은 황제로부터 받은 훈장을 내려놓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이 행복을 영원히 놓치지 않게 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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