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의 피해자 36

2024. 6. 9. 07:42사회의 피해자

서영석의 자녀들(2)

서영석의 큰딸은 아버지를 따라 세르비아로 망명을 갔는데, 착하고 얌전한 성격이었다.

202183일생으로, 영어와 독일어를 할 줄 알던 그녀는 베오그라드의 한 꽃집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주문 전화보다 한국인의 협박 전화가 더 많았던 터라 그녀는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어느 날, 한국인의 전화가 있었다.

여보세요?”

꽃 좀 주문하려고 전화했는데, 장미 한 다발 주문하려고요.”

죄송합니다. 다시 말해주시면.”

그 때, 전화한 사람이 버럭 화를 내며,

전화번호 하나 똑바로 못 받아 적은 주제에 무슨 장사야! 니네 나라로 가!”

서영석의 큰딸은 전화를 끊고 울음을 터뜨렸다.

'단지 번호를 못 적었을 뿐인데 어떻게 저런 말을.'

그녀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수화기만 들고 있었다.

이것도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한국인의 차별이라기보다

자신들의 뜻에 맞지 않은 사람에 대한 심각한 차별이었고, 그들에게 이보다 더한 인종차별을 겪었고,

조국을 떠나면 으레 겪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한국인의 토착 이방인에 대한 차별과 한국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은 더 심해졌다.

그때 꽃 가게 옆에 있던 식당에서 일자리를 줘서 잊고 있던 고향 요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 TV에 나온 서영석의 큰딸은 이렇게 말했다.

제 음식이 낯설 텐데도 기꺼이 먹고 맛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행복해요. 지금은 제 음식에 자부심이 생겼어요.

여전히 제 음식은 외국인에게 낯설지도 몰라요. 그래서 친숙하게 보이려고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해요.

'이 음식은 한국 음식과 비슷하니까 먹을 수 있겠군.' 이렇게 생각하게끔 말이에요.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제 정체성을 잃지 않는 거예요. 제 음식에는 이민자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이제는 제가 만든 음식을 먹으려고 사람들이 줄을 서요. 저는 일을 하면서 자신감도 얻었고 더 강해졌어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기쁘고 자부심이 강했지만, 한국인은 그 식당에 일부러 가지 않았다.

난민에다 한국인의 이지메가 부친인 서영석과 그 가족에게 두루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세르비아계 뉴질랜드인 남자친구와 약혼한 서영석의 큰딸은 결국 그와 결혼했고, 시아버지는,

"지금, 이 고생이 앞으로의 네 인생에 있어 꼭 필요한 과정임을 알고 힘들더라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은 그녀가 결혼하여 어머니가 되어서야 자신보다 큰 사랑으로,

그 사랑에 따라갈 수 없는 사랑임을 그녀는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조금만 더 일찍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 너무도 죄송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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