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석이의 성공기

2018. 4. 7. 18:19나의 이야기

소설
진석이의 성공기
堂井 김장수
 
내 이름은 강진석. 1989년생이다. 호는 문헌(文軒)이다. 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출퇴근할 때 남들은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데 나는 대중교통 체질이어서 근처 별내역에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
그럴 때마다 처남이 자동차를 몰고 별내역까지 바래다 주고, 퇴근할 때는 처남이 마중을 나온다.
옛날에는 퇴계원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서울에 갔었는데, 그 때는 내가 어렸을 적 얘기였고,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지금 난 삼광 슈퍼스타즈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래서 선수로 활약하며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있다.
나는 지금 부모님과 3남매를 둔 아내, 장인어른, 장모님, 여동생과 처남, 그리고 조카 둘과 살고 있다.
지금 내게 딸린 우리 집 식구들은 자그마치 12식구이다. 그래서 별내동에서 가장 큰 집에서 살고 있다.
내가 매일 서울에서 농구선수로 활약을 할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우리 진석이, 잘 갔다 와야 한다. 맛있는 거 많이 해 줄게.”
이러시는 거다. 아버님께서는,
“진석아, 너는 진주 강씨 가문의 자랑이다. 열심히 노력하고, 절대로 승부조작을 하면 안 된다. 알겠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면 나는,
“예,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이렇게 대답하곤 한다. 그리고 장인어른께서는,
“자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게. 돈에 눈멀어 비상식적인 짓은 하지 말게. 자네는 우리 식구의 희망이니까.
자네는 잘 해낼 거야.”
이렇게 말씀하시고, 장모님께서는
“자네는 우리 집안의 희망이야. 자네가 좋아하는 토마토 스파게티 국수 많이 해줄 테니, 다치지 말게. 몸조심하고.”
이러시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알겠습니다. 몸조심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한다. 아내에게는,
“나 갔다 올게. 애들 잘 부탁해. 양가 부모님께도 잘 해 드려.”
그렇게 말한다. 그럼 아내는,
“알았어. 당신 몸조심하고 잘 다녀와. 사랑해.”
그렇게 애정표현을 한다. 그리고 여동생은,
“오빠, 잘 다녀와요.”
이런 표현이 온다. 그래서
“진현아, 잘 갔다 올게.”
그러면 처남은,
“매형, 제가 역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힘이 생기고 시합을 잘 할 수 있기에 행복하다. 그렇게 일상은 시작되고,
아침 식사는 제육볶음에 김치, 현미밥이지만, 남들처럼 사치스럽게 살고 싶지 않았기에 늘 겸손하게 살고 있다.
어떤 농구선수는 돈 가지고 사치스런 삶을 사는데 난 절대로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어떤 농구선수가 돈 가지고 사치를 부리며 이렇게 말하면,
“나는 행복하게 사는데, 진석이 넌 왜 식구들을 12식구나 거느려?
우리 집 식구는 고작 3식구지만 세 식구가 다이아몬드 반지에다 아들 하나면 족한걸.”
그래서 난 그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난 부모님과 장인어른 내외분을 모시고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면 만족해. 너도 사치를 버리고 부모님께 효도하도록 해.”
그러면 그 친구는 수긍을 하며 받아들인다. 그렇게 나는 정도를 벗어난 삶을 살고 싶지 않았기에, 바른 길을 가려 노력한다.
그 비결은 매일 도덕 교과서와 성경을 보곤 한다. 그것이 내가 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다.
나는 12식구의 가장이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 수 있기에.
내가 전철로 농구하러 출퇴근을 할 때마다 소녀 팬들이 사인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어르신들은,
“자네 농구 잘 한다며? 우리 손주들도 자네처럼 잘 자라야 할 텐데….”
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때로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양가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
얼마나 복된 일인지 언젠가는 온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 고향은 남양주시 오남면이었다. 그 곳은 그가 태어날 당시 농사일을 많이 하던 동네였다. 1남 1녀 중 내가 오빠였다.
어릴 적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나, 그리고 진현이가 가족의 전부였다.
학교 친구들은 서로 사이좋게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도둑질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아버님께서 학원 강사셨기에 그래도 입에 풀칠은 하고 살았다.
아버님께서는 내게 늘 말씀하셨다.
“어떤 일을 하건 간에, 꿈을 갖는다는 것은 행복한 거야. 진석아,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좋아하는 것을 하렴.
너도 이제는 공부 잘하고 있으니까 뭐라 하지는 않겠다. 무슨 일을 하건 공부를 하고 꿈을 키우렴.
그 대신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알았지?”
어릴 적에 아버님께서 내게 한 말씀 덕에 나는 올바른 농구선수로 살아가는 기반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올바르고 모범적으로 사는 원동력이 되었다.
부모님과 지금은 돌아가신 조부모님의 사랑과 배려는 내가 농구를 모범적으로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에는 나쁜 아이들과 싸울 뻔했다. 나쁜 아이들이 여자애들을 괴롭히기에,
“그만둬. 여자애들을 괴롭히는 건 잘못된 거야. 이런 법은 없어.”
그 때문에 친구들과 싸우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교장선생님께서 갑자기 오셔서,
“그만 두지 못해! 당장 교실로 돌아가!”
이런 호통 때문에 나쁜 아이들은 도망가고, 나는 교장선생님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나쁜 아이들이 여자애들을 괴롭히기에 그만 두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를 향한 교장선생님의 말씀,
“그랬구나. 진석이는 착한 아이구나.”
덕분에 여자애들 중 지금의 아내에게,
“걱정 마. 내가 지켜줄게.”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지금의 아내는,
“진석아, 고마워. 너하고 결혼하고 싶어.”
이러는 것이다. 그것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말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는 자랑하고 싶지는 않다.
공부는 선생님께 칭찬을 잘 들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공부를 잘 한 건 다행이자 잘한 거 아닌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운동회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 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4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농구를 보게 되었는데, 남자다운 매력과 멋있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달리기에서도 1등을 도맡아 하고, 농구라는 스포츠도 마음에 든다.
내 육상과 농구가 합한다면 최적의 결과를 낳을지도 몰라.’
그렇게 농구선수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아버님께,
“아빠,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씀드렸더니,
“그래라. 그 대신 모범적으로 해야 한다. 알겠지?”
하시며 아버님께서는 흔쾌히 승낙하셨다. 어머님께도 말씀드렸더니, 역시나 흔쾌히 승낙하셨다.
그렇게 육상과 농구의 조합으로 농구를 하니 실력도 늘었고, 키도 빨리 자랐다. 또한 줄넘기도 하루 3천 번이나 하니,
얼마 후 그 높은 농구 골대도 한 손으로 잡을 만큼 점프력도 높아졌다.
지켜보는 지금의 아내도, 장인어른 내외분도 흡족해 하셨다. 선생님들과 부모님께서도 배려해 주심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아 이번에 창설된 농구부 주장이 되었다. 처음에는 3번이나 연습 시합에서 졌다.
하지만 내 실력을 인정받아 6학년 때 전국 소년 체전에서는 금메달을 땄고, 중학교 때는 농구부에 정식으로 가입했고,
고등학교 때는 전국체전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위기는 있었지만, 별것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선배님들은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를 보냈지만,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실력과 인성을 갖춘 나를 배려해 주게 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내가 매일 밤 11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와도 나를 이해해 주셨다.
가족과 학교, 그리고 주변의 배려와 사랑으로 나의 농구 실력은 더욱더 늘었다.
당시 나에게는 마이클 조단, 샤킬 오닐이 내 우상이었다.
그들처럼 농구 선수가 되면 부모님께 효도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내가 농구를 택한 이유는 그것뿐이다.
하지만 공부에도 힘을 기울여 소홀히 여기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전교 1등도 했고, 수능은 만점을 받았으며,
서울대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서울대 농구부에 발탁되었다. 뿐만 아니라 장학금까지 받게 되었다.
TV에도 신문에도 나오자마자 주변에 있는 사람들, 특히 부모님께서는 정말로 자랑스러워하셨다.
나는 지금 고향에서 충분히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또한 집도 있다. 부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자녀 3남매, 아내, 여동생,
처남, 조카 둘이 살만한 방이 5개나 되는 큰 집이 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방이 8개나 되는 큰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다. 내 이름 진석(進晳)은 ‘밝게 나아간다’라는 뜻이다.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다.
어렸을 때 별명은 ‘범생이’였다. 지금 내 별명은 은조룡(銀爪龍)이다. '은빛 손톱의 용'이라는 뜻이다.
체격 조건이 좋다 보니 농구가 내 삶이 되었다. 여러 종목 중에서 굳이 농구를 택한 이유는
부모님이 농구선수가 꿈이었지만 양가 조부모님의 반대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으셨나 보다. 원래 건장한 체형은 아니었다.
하지만 육상, 농구, 줄넘기 3천 번을 하고 나니 3년 만에 35cm나 컸다. 주위에서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흡족해 하셨다. 만일 내가 농구를 하지 않았다면 과연 어떻게 살고 있었을지,
지금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내 나이 37세.
하지만 친구들 중에는 결혼도 못 하고 아이도 못 낳는 '취준생'으로 사는 친구들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니 하느님께 너무나도 감사하다. 이제 나는 지금의 아내와 25살에 결혼식을 치렀고,
좋은 집에서 가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
최근에는 내가 국가대표에 뽑혀 올림픽에서 필리핀, 이란, 미국 등의 강호와 겨루어 금메달을 땄다.
나는 취준생 친구들에게 말하고 싶다.
“이 비참한 삶에 주저앉아 안주하지 말고 꿈을 위해 노력하라. 나는 열심히 농구를 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니
모두 나를 알아본다. 여러분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
 
- 끝 -

P.S. 리카르도 라틀리프의 삶을 모티브로 지은 소설입니다. 잘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세요. 복사하고 싶으시거든 댓글 먼저 올려주세요.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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