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의 권투인생

2017. 1. 8. 22:22나의 이야기

소설

경일의 권투인생

堂井 김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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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松齋) 장경일. 탄생일은 2008년 8월 8일. 자는 상기(常紀). 별명은 정권자(正拳子).

직업은 권투선수 겸 시민운동가. 그의 탄생일은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된 날이었다. 그는 굴곡진 인생을 살았다.

송재 장경일의 고향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였다. 부친은 길거리 청소부였고,

모친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장경일을 뒷바라지했다.

당시 장경일이 살던 곳은 재개발지구였다. 이웃들이 서로 어울려 다니며 서로서로 돕는 동네였다.

어느 날, 경일은 부모님에게 권투를 하겠다고 말씀드렸다.

“아빠, 엄마, 저 권투 할래요.”

“그래라. 대신 친구하고 싸우면 안 된다.”

가난한 집이었기에 부모님은 경일의 권투 생활을 뒷바라지 해 주셨다.

또한 중학교 때에는 복싱부에 들어가 기본 기술과 체력을 다져 나갔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복싱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금메달을 따는 것을 TV로 보고 경일은

“나도 저런 훌륭한 선수가 되어야지.”

라고 다짐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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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 밖에서는 거침없는 언행으로 유명한 송재 장경일. 하지만 그는 링 위에서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였고, 모범적인 권투선수였다.

또한 링 위에서는 세계 챔피언을 석권하며 복싱 무대를 호령했으며, 링 밖에서는 대한민국 안의 인종차별과 전쟁 반대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고 무하마드 알리가 그랬던가? 나도 그를 우상으로 공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옛날처럼 구차하게 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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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정의, 그리고 평등을 위해서는 나는 싸울 것이다.

죽고 천국에 가는 날에는 자유와 정의와 평등을 위하여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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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인류는 어떠한 조건 안에도 평등하게 살 권리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이 지어주신 최고의 창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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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을 반대한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비록 우리 대한민국이 통일되었지만,

나는 갈등과 전쟁을 반대한다. 갈등과 전쟁을 이겨내는 나라는 번영과 행복이 뒤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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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물 때문에 꿈이 망가진 선수들을 많이 보았다. 약물은 자나 깨나 조심해야 한다.

약물을 먹고 경기력이 오르는 건 그 순간뿐이지만, 그 뒤에는 명예도 지위도 돈도 다 잃는다.

그러니 약을 먹고 싶을 때는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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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은 권투신동이었다. 전국체전의 단골손님은 예사고, 20세 때인 2028년 올림픽에서는 라이트 헤비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가족들은 기뻐했다. 아버지는

“우리 경일이가 금메달을 땄다! 장경일 파이팅!”

이러는 것이었다. 장경일의 출세는 곧 국민들의 기쁨이자 큰 경사였다.

하지만 학교에서, 교회에서 경일의 금메달은 눈엣가시였고, 언짢은 일이었다.

아무튼 경일이 금메달을 따자 그의 삶은 크게 바뀌었다. 올림픽이 끝난 후 집에 돌아와서 동네에서는

‘송재 장경일 상기의 금메달을 축하합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큰 환영을 받았지만,

대학교에서, 교회에서 그는 크게 환영받지 못했다. 경일이 다니던 대학교에서는 정문에 ‘장경일! 공부 좀 해라!’라는 플랜카드와

‘장경일은 민주주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라는 대자보가 나붙었다. 또한 대학 친구들마저도 경일을 보면

경일이 들으란 듯이 험담을 하는 것도 서슴지 않고 했으며, 심지어 대학 교수마저도 취직하자고 설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한 대학교수가 말하기를,

“장경일 군, 이제는 취직이라도 해야지. 언제까지 싸움질에 매달려 살 거야? 그렇게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키면 안 되는데….”

“저는 권투가 좋아요. 권투야 제가 조심하면 되지 않을까요?”

“내 말 들어! 적당히 해야지. 장경일 군이 취업을 해서 우리 학교가 원하는 인재로 사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었는데,

내가 몇 번 주의를 줬지? 줬어, 안 줬어?”

“저는 권투가….”

이 말이 끝나기 전에,

“묻는 말에나 대답햇!”경일은 이 말에 속으로는 이를 갈았다. 마지못해 한 대답은,

“…주었습니다.”

“그럼 괜찮은 회사에 취직해서 우리 학교를 빛내야지. 다른 학생들은 경일 군처럼 살지 않고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하는데,

경일 군만 그렇게 살고 말 건가? 다른 사람들처럼 취직해서 부모에게 효도해야지. 그래, 안 그래?”

“하지만 제 부모님께서는….”

“그래, 안 그래?”

“제 얘기를 들….”

“그래, 안 그래?”

“저는 권투가…”

“그래, 안 그래?”

대학교수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인다. 평소 경일이 하는 행동을 언짢게 바라보던 그들은

경일이 원하는 길을 가게 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이제 경일은 그 대답이 귀찮게 들린다. 결국,

“안 그래요!”

이 말에 대학교수는 분노하며 경일의 따귀를 때린다.

“건방진 새끼! 넌 이제 대학에서 퇴학이야!”

이를 들은 다른 대학교수도,

“너 언제 인간 될래? 나는 인간 안 된 놈은 제자로 안 삼아.”

또 다른 대학교수는,

“그냥 잘못했습니다 그러는 게 그렇게 어려워?”

경일은

“저는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저를 환영해 주실 줄 알았는데, 제가 금메달 좀 따오는 것이 그렇게 미웠나요?”

경일은 대학에서 보이지 않는 ‘인민재판’ 방식의 강압적인 교육 시스템이 싫게 느껴진다.

경일의 이 말에 결국 교수 휴게실은 싸늘하게 얼어붙었고, 대학교수의 한 마디,

“자퇴서 쓰고, 가!”

경일은 결국 교수 휴게실을 말없이 나가 버린다. 그 후 대학 자퇴서를 쓰고 제출한 다음, 교회에 갔다.

그렇게 경일의 대학 생활은 끝났다. 하지만, 교회에서도 냉대는 마찬가지였다.

교회 성도들은 아무 말도 없고 심지어 외면하기까지 했다. 경일은 교회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채 말없이 나갔다.

그렇게 경일의 신앙생활도 끝났다. 대학에서도, 교회에서도 극심한 차별과 괴롭힘, 그리고 거절과 회유와 설득에 시달려야 했다.

어떤 친구는,

“장경일, 다른 사람처럼 취직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니?”

또 다른 친구는,

“그깟 금메달이 뭐가 중요하냐? 취업이 중요하지!”

교회 다니는 어떤 청년은,

“너 그렇게 살면 지옥 간다!”

이렇게 공갈 협박을 하는 것이었다. 교회 권사님은,

“경일이도 이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해야지. 평생 그렇게 살 수 없잖니?”

교회 목사님은,

“그 시간에 성경도 읽고, 말씀도 듣고, 모든 걸 중단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자. 응?”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은,

“경일아, 이제 다시 시작해 보자. 내가 원하는 취업, 남들과 똑같은 길, 남들과 똑같은 삶을 살면서

대한민국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자. 도와줄게. 권투 그만두렴. 응? 부탁이야….”

이렇게 말하며 흐느끼며 우는 것이었다. 또한 교회 사모님은,

“너 하나님께 순종 안 하면 너 왕따 시킨다! 교회 다닐 사람만 환대해 줄 거야!”

이러는 것이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경일은 주변에 권투를 계속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돌아온 답은 늘 그랬듯이

“권투 그만두면 취직 특례 보장한다!”

이런 말만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장경일 출입금지’

라는 푯말이 붙어 있었고, 폭력배로부터

“장경일, 너 금메달 반납해라. 안 그러면 손모가지를 분질러 버린다!”

이런 협박에 시달리기도 했다.

결국 저주받은 대한민국에 환멸을 느낀 경일은 2030년 4월 22일에 남아공으로 떠났다.

그렇게 경일에게 조국의 문은 철저히 닫혀 있었다. 경일은 훗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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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을 대표해 금메달을 따냈다고 생각했던 환상이 그때 사라졌다.”

라고 말했다. 그 후 남아공으로 귀화해 프로 무대에 뛰어든 경일은 열심히 했다.

현란한 스텝과 뛰어난 반사 신경, 정확한 펀치로 무장한 경일은 프로 무대에서도 승승장구했다.

그는 2032년 3월 25일 복싱 헤비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미국의 챔피언을 5라운드 TKO승을 거두고

WBA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곧바로 존 사이먼 경일 장으로 개명했다. 그는 한창 인기를 구사하던 당시,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의 철학을 인생에 투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경일은 한때면 지나갈 인기에 연연할 생각이 없었다.

경일은 당시 남아공 귀화 사실을 알리며,

“나는 한국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이 조금도 없고, 한국인과 결혼할 생각도 없다.

난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들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이 대서특필되자, 한국 국민들은 장경일을 성토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입국이 금지되었다.

경일은 링 안에서는 화려한 복싱으로 팬들을 열광케 했고, 링 밖에서는 거침없는 독설과 사회활동으로

언론에 본인의 이름을 도배했다. 물론 남아공에서 전쟁 반대와 봉사활동으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궐석재판에서 금메달 박탈 선고문이 날아왔고,

한국 교포들은 장경일을 사형시켜 달라고 서명운동을 펼치기까지 했다.

2037년 5월 5일에는 경일은 순자산 822억 달러의 거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경일의 재산을 몰수하여 불우이웃 돕기에 쓰자!”

라는 여론이 나와 경일은 철저히 동포들에게 짓밟힌 시간을 보냈다. 경일은 원치 않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대법원 연설에서,

“나는 소위 말해 튀고 싶어서 안달 났다고 한국인에게서 버림받았고 대한민국에서 없는 행복을 누리고 사는데,

철저히 이기적인 동포들이라는 범죄 집단을 위해 돈을 쓸 수는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남 잘 되는 꼴도 못 보고,

남 짓밟기와 경쟁을 즐기는 사람들뿐입니다. 저는 더 이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제 돈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나는 권투선수라는 이유만으로 이 나라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데,

동포라는 집단을 위해 나의 행복을 희생할 순 없습니다!”

이렇게 외쳤다. 그러자 사방에서 욕설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장경일은 이 땅을 떠나라!”

“넌 이 새끼야, 개념도 없어? 쓸개도 없어?”

“저 새끼, 순 깜둥이 꼬붕이라니!”

“니 에미가 그렇게 가르쳤냐!”

“널 낳아준 니 부모가 불쌍하다, 이 새끼야!”

대법원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러자 판사가,

“조용히 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퇴장시키겠습니다!”

그 후에도 욕설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고, 결국 판사는 경일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얻은 귀중한 판결이었다.

하지만, 동포라는 집단은 경일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경일이 살던 집에는 온통 낙서투성이였고,

경일의 미니홈피에서는 저주와 욕설로 도배를 했다. 경일의 부모는 심한 왕따와 폭력에 시달리다가 어머니는 화병으로,

아버지는 자살하고 말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경일에게,

“야 이 새끼야, 권투해 가지고 혼자 잘 먹고 잘 사니까 기분 좋냐!”

이런 악담까지 퍼부었다. 어떤 사람은 경일 앞에서 거액의 금액을 로비하면서,

“지금이라도 권투 그만두시면 취업 특례 보장해 드릴게요.”

하며 경일에게 뇌물을 제시했으나, 그런 것에 굽힐 경일이 아니었다. 그런 경일을 보고 한국 네티즌들은,

경일이 번 돈으로 소년소녀가장, 불우이웃, 노숙자, 독거노인 돕기 타령을 해대며 괴롭히기를 즐기기까지 했다.

경일은 우여곡절 끝에 무죄 판결을 받고 1년 후인 2038년 3월 22일에 링에 돌아왔지만, 경일은 많은 것이 변해있었다.

경일은 더 이상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남아공에 돌아간 경일은 주특기였던 스텝을 빠르게 하기 위해 훈련에 몰두했다.

2040년에는 여러 가지 챔피언 벨트와 여러 개의 TKO승, 여러 개의 KO승을 거두었는데,

경일은 이미 싸움을 거듭할수록 철저히 강해져 있었다. 그리고 한 번도 져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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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고 지는 것은 하느님께 달린 것이다. 불효자식인 내가 무슨 낯으로 한국에 돌아가겠느냐마는,

이왕 성공한 이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뼈를 묻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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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2년, 경일의 나이 어느덧 38세. 여태까지도 경일의 기량은 지독하리만큼 떨어지지 않았다.

한국 챔피언 김상규와 경기를 치르게 되었을 때. 김상규가 하는 말,

“장경일, 너는 조국을 배반하고 부자가 되었어. 그렇게 살고도 제대로 살 것 같아?”

“김상규, 너는 그래도 행복한 거야. 너는 사랑할 조국이 있잖아.”

“그래? 알았어.”

“나는 더 이상 한국 사람이 아니야.”

“좋아. 내 주먹으로 깨우쳐 주지. 너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말이지!”

김상규가 주먹을 날리자마자, 장경일은 오른쪽으로 피해 왼 주먹으로 김상규의 턱을 올려쳤고,

김상규가 당황하자 때를 놓치지 않고 오른 주먹으로 김상규의 뺨을 후려쳤다. 단 몇 초 만에 김상규가 쓰러지자,

관중들은 당황했다. 10초가 지나도 김상규는 일어나지 못했다. 장경일의 승리였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경일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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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가 나를 깨우쳐 주었습니다. 나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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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김상규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간 경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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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너를 이렇게 만들 의사는 없었는데….”

“괜찮아. 나는 이렇게 쓰러지지 않아. 경일이 너도 멀쩡히 세계 챔피언이 됐잖아? 차라리 그것이 나은지도 모르지.

하지만 기억해 줘. 너는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야. 하지만 너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어.”

“이제 나는 권투선수를 은퇴할 생각이야.”

“그래? 잘 됐네. 그만두면 뭘 할 거지?”

“자선단체를 만들 생각이야.”

“그럼 왜 국민이 하자는 대로 하지 않지? 동포들이 원하는 대로 했으면 이런 일은 없었잖아?”

“나는 남들처럼 살기 싫었어.”

“네 마음 모르는 바 아니지만, 더 이상 한국은 네 조국이 아니야.”

“고맙다, 상규야. 이제는 타국에서 새 삶을 살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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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은 2043년 1월 3일 권투 선수 은퇴 의견을 밝혔다. 통산 전적 67승(65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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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권투선수를 은퇴할 생각입니다. 자선단체를 하나 만들어 착한 일 좀 해야겠습니다. 은퇴식 없이 은퇴하는 건 아쉽지만,

나 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기에 은퇴식은 생략하기로 하겠습니다. 무하마드 알리가 자유와 정의, 평등을 위해 싸웠다면,

저는 대한민국의 안타까운 부분들을 메우기 위해 싸운 사람으로 기억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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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일은 은퇴 후 자선단체를 하나 만든다. 2043년 6월 1일, ‘남아프리카 송재 장경일 자선기금’이 설립된다.

이 단체는 남아공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학업의 기회를 주고, 나아가서는 여러 가지 운동도 가르친다.

2044년 6월 12일, 네덜란드인과 결혼한 경일은 2045년 9월 3일에 외아들 승준이를 낳았다.

‘남아프리카 송재 장경일 자선기금’은 남아공에 본부를 두고 콩고민주공화국,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보츠와나, 쿠바, 시리아,

리비아 등에도 퍼져 나갔다. 다만 한국에는 지부를 두지 않았다. 한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조국을 배신한 놈이 만든 재단 따위는 필요 없으니 너 갈 길을 가라는 식이었다.

실망한 송재 장경일은 한국에는 절대 지부를 세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다.

경일은 자선단체를 운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2056년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나와 성화대에 점화했다.

그는 남자 축구 결승전 하프타임 때 미국 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받고, 2057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송재 장경일은 어느덧 80세가 되었다. 파킨슨씨병과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하면서도 자선을 멈추지 않았다.

그 후 한국에도 장경일 자선단체가 설립되어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등으로 퍼져 나갔다. 83세 때인 2091년에는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갈등과 저주를 이기고 힘차게 번영하고 있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한국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느낀 후, 경일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과 손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예수님 곁으로 간다. 나는 남아공에 묻히기 바란다. 내가 딴 금메달은 잘 간직하도록 해라.”

송재 장경일의 나이 향년 85세. 2092년 11월 2일에 송재 장경일은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세계 권투 역사 최고의 영웅이었다. 재단은 아들 승준이 계승했다.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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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으로 좌절했으나 주먹으로 이겼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그의 꿈과 흔적은 영원히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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