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조국

2016. 12. 13. 11:40나의 이야기

소설

마지막 조국

堂井 김장수

 

김영수. 그는 1991년 8월 15일에 태어났는데, 어릴 때부터 아이큐가 450 이상이었다. 3살 때는 천자문도 뗄 정도로 천재였다.

집안 어른들은 그런 김영수를 보고,

“이 아이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라고 말하시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4살 때인 1995년 3월 24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 후 부모님은 초등학교 재학 동안 영수를 여러 학원에 보냈다.

- 유치원, 음악 학원, 속셈 학원, 태권도 학원, 바둑 학원, 수학 과외 등 - 그렇게 부모님은

영수가 교양을 갖추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셨다. 이때의 경험이 영수를 성숙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수는

“대한민국에서 전에 살던 생활은 불행했었다. 극복할 수 없었고, 그럴 자신이 없었다.”

라고 술회했다. 어쩌면 영수는, 어른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하나의 도구였는지도.

7살 때 초등학교를 입학한 그는 받아쓰기를 잘 했고, 학교 쓰레기 줍기 봉사활동도 했다.

그래서 선생님과 친구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영수는

“나의 여자 친구가 되어 줄 사람이 내 주위에 한 명도 없었고, 다 나에게 아첨하여 ‘넌 착하니까 이거 사 주라.’ 하는 아이들뿐,

진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친구가 있어봐야 괴롭히고 놀리고 또 우정의 이름으로 따돌리는 친구들뿐이었다.

또한 친구들이란 자들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일상에서의 폭력을 합리화했다.”

라고 회상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떤 친구가 말하기를,

“영수는 마마보이야. 그러니까 친구가 없지.”

이렇게 비아냥대면서,

“너 괴롭히는 것도 친구니까 이해해 줘야지?”라며 인신공격을 했는데, 부모라는 자들은,

“어쩌겠니. 참고 다니렴.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 둬.”

이러면서 오히려 가해자 편을 들고 학교폭력을 방조했다.

학교에 가면 영수의 책상에는 온갖 낙서들로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수업시간에도 영수를 괴롭히기까지 했다.

영수 책상에 쓰레기를 넣고, 영수의 성기를 만지기까지 했다.

이렇게 영수는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다니느라 공부에 집중할 겨를이 없었는데,

부모라는 자들은 영수의 이러한 행동을 언짢게 여겼다. 엄마라는 사람은,

“영수야, 네가 공부 열심히 해서 학교에서 성적을 올리면 되잖아! 왜 그런 행동을 해가지고 부모 속 터지게 만들어!

그러니까 학교에서 너 싫어하는 거야!”

이 일을 선생님께 말씀드려도, 역시나 선생님들은 가해자 편이었다.

“영수야, 친구들이 너를 괴롭혀도 너에게 관심을 가져준다 생각해. 만일 친구들이 너를 괴롭히는데도 네가 이해를 못한다던가,

그런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네가 불행해져. 그러니까 네가 참고 견디면서 다른 사람과 똑같이 행동해 주었으면 해.

알겠니? 네가 근면과 성실로 다가가렴. 그럼 아이들이 너를 괴롭히지 않을 거야. 그렇게 해 줄 수 있지?”

영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저는 차라리 외톨이가 낫겠어요. 어디를 가도 제 편은 아무도 없었어요. 제게는 친구도 없어요.

제가 공부 좀 한다고 선생님까지 가해자 편을 들 줄은 몰랐는데, 정말 선생님한테 실망했어요!”

영수는 그 날로 나가 버린다. 선생님은 긴 한숨으로 마지막 이별을 예감한다. 다음 날, 영수가 교실로 들어오는데,

“조용, 조용히! 선생님이 영수한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요. 김영수는 이제 제적 처리되었어요.

이제 영수는 이 학교에 못 와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영수한테 할 말이 없어요?”

민석이가 한마디,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학교의 생활도 견뎌주기 빌었는데, 이제 영수는 학교 못 다니니까, 더 이상 괴롭힐 일도 없고,

더 이상 친하게 지낼 일도 없겠네? 잘 됐다. 영수 너, 괴롭히는 사람 없어 좋겠다!”

라고 비아냥댔고, 태섭이는

“너는 우정을 거부했어. 너 괴롭히고 너한테 심한 장난을 치는 것도 관심의 표현이야! 그런데 영수 넌 그것조차 거부했어.

이제는 학교에 올 필요가 없어!”

라고 일갈했다. 심지어 짝꿍마저도

“이제 너는 우리 아는 체도 하지 마! 잘못했다고 하던지 네 나라로 가!”

라고 소리쳤다.

친구들은 또,

“이제 너는 우리 친구도 아니니까 다시는 아는 체도 하지 마.”

“다시는 친구들 만날 생각도 하지 마!”

“친구에게 관대하지 못하는 놈은 개도 안 물어간대.”

그렇게 친구들은 영수에게 입에 담지 못할 소리들을 지껄여댔다. 그 시간은 영수에게는 소위 ‘조리돌림’과 같은 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이 사실을 알고 영수에게 다가와 말했다.

“영수야, 우리 다시 시작해 보자. 공부 열심히 하면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도록 노력해야지.”

영수가 하는 말,

“선생님도 가해자 편이잖아요?”

“영수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네가 이해해 주면서 그러려니 해야지. 응?”

“그러면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담임선생님의 긴 한숨, 그렇게 정적이 흐른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 학교와의 인연은 끝났다. 퇴학 처리가 된 것이다.

영수는 이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부모님은 펄쩍 뛰셨다.

“이제 우리 집안, 어떻게 해야 하니? 자식농사 망치고 어떻게 살아!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나가지도 못한 주제에 뭐? 퇴학?

당장 선생님께 잘못했다고 빌고 와!”

그렇지만 영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엄마 아빠는 제 편이 아니에요. 제 편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가해자들 편이잖아요. 한 번도 저한테 관심 가져 본 적 있어요?

제 학교생활에 관심이나 있었나요? 나 엄마 아빠 미워요!”

한동안 정적이 흐른다. 아빠가 마지막으로 한 말,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학교생활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그따위로 살아가는 거 구역질이 나!

이제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까 복지시설이나 고아원 알아보렴.”

그리고 엄마가 하신 마지막 작별의 말,

“이제 집에 다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마! 그리고 너 없는 애 취급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이제 다시는 영원히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그렇게 짐을 싸가지고 나간 영수. 그렇게 악연이 많던 부모, 친구, 선생님, 학교, …. 영수는 이제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했다.

얼마 후 친척의 소개로 가톨릭계의 고아원을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세레나 수녀님과의 대화를 보자.

 

수녀님 - 영수는 친구도 가족도 없지?

영수 - 있으나 마나예요.

수녀님 - 왜 그렇게 생각하지?

영수 - 제 주위에는 괴롭히는 친구들뿐이었고, 선생님이나 가족들도 그 친구들 편이었어요.

수녀님 - 그런 학교에서 지내면서 마음이 아팠겠구나. 이제 중학교도 알아보고 공부도 열심히 해야겠지?

영수 - 제가 그럴 자신이 있을까요?

수녀님 - 그럼. 이제 너는 하느님의 아들이야. 이곳에서 천주교 교리도 배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가 되었어.

너 공부 잘 하더라?

영수 - (웃으면서) 조금요.

수녀님 - 이제는 괴롭히는 친구들 없이 살 수 있게 된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야.

하지만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라는 말이 있잖니?

영수 - 그럼 여기서 뭘 어떻게 해야 하죠?

수녀님 - 여기서 공부도 하고 하느님 말씀도 배우고, 미사도 드리고 그래야겠지?

영수 - 그럴게요.

 

그렇게 영수 베드로는 그 고아원에서 천주교 교리와 학교 공부를 하나하나 익혀 나간다. 힘들지 않는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만,

영수 베드로는 그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영수의 하루 일과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아침 5시 30분에 기상

2. 아침 6시에 미사

3. 아침 7시 30분에 아침 식사

4. 아침 9시에 학교 등교

5. 정오 12시까지 오전 학교 수업

6. 정오 12시에 점심 식사

7. 오후 1시까지 운동

8. 오후 4시까지 오후 학교 수업

9. 오후 6시까지 보충 공부

10. 오후 6시 30분에 저녁 식사

11. 저녁 7시부터 밤 9시 30분까지 자율 공부

12. 밤 9시 30분부터 밤 10시 30분까지 자유 시간

13. 밤 11시에 취침

 

주일에는 영수는 미사를 드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천주교 미사를 드리면서 그 동안의 아픔들을 깨끗이 씻어 나간다.

그 일과에 적응해가면서 지난날들을 잊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덧 세월이 흘렀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 시험을 볼 때가 다가왔을 때도 영수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지만,

영수의 기억에서는 고향에서 있었던 일들은 모두 잊혀진 추억이 된 지 오래였다. 영수 베드로도 이제 수능을 볼 때가 되었다.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그리고 고아원 친구들도 영수를 격려해 주었다. 만일 고향에서 이런 수능을 보았더라면,

아니, 그 전에 정신병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영수 베드로는 고아원 식구들이 너무 고마웠다.

반겨줌. 그것이 없는 사회에서 살 생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수능 전날 밤, 세레나 수녀님이 영수 베드로를 부르셔서 수능 이후 무엇을 할지 진로를 결정하자고 말했다.

사실 영수는 아직 수능 이후의 진로를 결정하지 못했다.

 

수녀님 - 영수 이제 수능 보네?

영수 - 네.

수녀님 - 수능을 치르고 나면 무엇을 할 생각이니?

영수 - 취직은 자신이 없고요, 학자가 되고 싶어요.

수녀님 - 무슨 방면의 학문을 공부하고 싶니?영수 - 역사 학문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수녀님 - 영수는 역사에 관심이 많은가 보네?

영수 - 예. 한국 역사는 웬만큼 알아요.

수녀님 - 그리고 영어도 열심히 공부했니?

영수 - 그럼요. 영어, 중국어, 일본어 등도 조금 해요.

수녀님 - 알았다. 영수는 이제 중국어과 알아봐야 할 것 같다.

영수 - 그럼요. 이젠 한문도 많이 알아요.

수녀님 - 그럼 중국어과 들어가서 학문을 깊게 연구해 보면 어떨까?

영수 - 그렇게 할게요.

수녀님 - 이번 수능 잘 보고 힘내렴. 너는 꼭 할 수 있을 거야.

영수 - (울먹이며) 한 번만 안아주세요.

 

영수는 세레나 수녀님의 품에 안겨 펑펑 울었다. 그 동안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영수를 감싸고돌던 외로움의 벽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영수는 친구들과 수녀님의 응원 속에 수능을 치렀다. 1교시 국어, 2교시 수학, 3교시 영어,

4교시 사회탐구 중 국사, 정치, 한국근현대사, 윤리, 5교시 제2외국어 중 중국어를 보았는데,

영수는 특히 역사, 정치, 중국어에 재능을 보였다. 얼마 후, 영수는 어느 대학교 중어중문학과에 당당히 1등으로 합격했다.

합격한 해는 2010년이었다. 영수를 알아보는 학우들이 있어 지금은 괜찮지만,

영수는 대학 졸업 후 무엇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고민 끝에 영수는 싱가포르로 떠나기로 했다.

어떤 학우는,

“영수는 그냥 취직이 나을 것 같아.”

또 어떤 학우는.

“자격증 하나라도 따야 하지 않을까?”

그 말들이 자꾸 생각나 영수는,

‘이 나라에서는 취직 이외의 어떠한 길도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 취직이 다란 말인가?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난 평생을 그렇게 살기 싫다!’

세레나 수녀님과 상의를 했다. 그리고 영수는 결심했다. 싱가포르로 떠나기로.

세레나 수녀님의 말씀,

“영수야, 싱가포르로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알겠지? 이제는 네 일은 네가 스스로 해야 하니까.”

정들었던 조국, 정들었던 친구들, 정들었던 제 2의 고향. 하지만 영수는 떠나야 한다.

대한민국을 떠나 영수 자신의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

 

그 후 수석(水石) 김영수는 2016년에 싱가포르 시민권을 얻었다. 반듯한 직장도 갖고,

어느새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한국어 이외에도 말레이어, 인도네시아어, 타밀어, 아랍어 등도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하지만 한국에 귀국하려 해도 다시는 갈 수 없게 되었다. - 아니, 갈 겨를도 없었다. - 부모님의 부고,

세레나 수녀님의 선종(善終), 그러한 일이 있어도 갈 수 없었다. 바빴기 때문이었다. 영수는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세요.”

수석 김영수(영문명 피터 영수 김). 그는 대한민국 땅에서 불행했어도 싱가포르에 이민 와서는 행복을 찾았다.

폴란드계 싱가포르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 장녀 김경희 헬렌은 인도에서 자원봉사자로 활약했고,

차녀 김미희 수잔은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장남 김용승 필립은 희귀병 연구를 하는 의사가 되어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았고,

차남 김용만 펠릭스는 주 독일 대사를 지냈다. 3남 김용섭 사이먼은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아 전 세계에서 문명을 떨쳤다. 수석 김영수는 자녀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2051년 한국에 왔을 때, 수석 김영수는 폴란드인 아내를 데리고 왔다. 자녀들은 바쁜 상태였다.

폴란드인 아내에게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한국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1. 남북이 통일되었다.

2. 북한에도 개발의 바람이 일었다.

3. 인구가 줄었다.

4. 각지에 아파트가 세워졌다.

5. 친환경 에너지가 많이 사용되었다.

6.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7. 수석 김영수 자신도 노인이 되었다.

8. 자신이 살던 고향집은 이미 철거되어 새 아파트가 조성되어 있었다.

9. 한국 문화재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0. 세금을 내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11. 고속철도가 북한까지 연장되었다.

12. 친환경 발전소가 북한에 들어섰다.

13. 남북한 사람들이 사이좋은 형제처럼 하나가 되었다.

 

수석 김영수. 그는 싱가포르에서 순자산 811억 달러의 부자가 되었고, 친환경 사업을 발전시켜 싱가포르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영수는 한국에 갈 수 없는 몸이 되었기에.

김영수는 이렇게 혼자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 마지막 조국은 대한민국만한 나라가 없지. 어쩌면, 오늘의 내가 있은 건 세레나 수녀님 덕분이지.”

영수는 부모님 산소나 가톨릭 공동묘지 방문을 끝으로 대한민국을 떠났다. 마지막 조국을 그리며 떠난 그이기에 후회는 없었다. 수석 김영수. 그는 이제 싱가포르와 대한민국을 오가며 한국의 발전과 싱가포르의 발전을 위해 많은 공을 세웠다.

만일 이대로 한국에서 살았다면 고통 속에서 평생을 보냈을지도 모르니까. 수석 김영수. 이제는 그는 싱가포르 사람이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훈장도 받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민훈장도 보내왔다.

세월이 흘러 수석(水石) 김영수도 노인이 되었다. 싱가포르 국적으로 한국에 두 번째 방문을 했는데,

그의 나이 91세, 서기 2082년. 이제는 김영수도 천국에 갈 때가 되었다. 그토록 애증(愛憎)했던 대한민국의,

어둠 속에 밝아오는 여명을 바라보면서. 폴란드인 아내는 3년 전 세상을 떠나

김영수는 정동진역 의자에 앉아 마지막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미안하오. 나는 당신 곁으로 가려 하오. 기다리시게. 나는 당신 곁으로 갈 테니까.”

수석 김영수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이미 그의 영혼은 천국에 오르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정동진역에 나진으로 가는 기차가 들어섰다. 여행객들은 어떤 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내리자마자 여행객들은 그 노인을 깨우려고,

“할아버지, 잠깐 일어나 보세요. 어? 꿈쩍도 않네?”

“가족 분들에게 연락을 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날씨가 추운데, 누가 경찰 좀 불러줘야지!”

“119도 불러요.”

얼마 후 경찰이 역내에 들어와 노인을 깨우려 하나, 이미 몸은 굳어 있었고,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어르신, 일어나 보세요. 여기는 추워요.”

그러나 반응이 없다.

“어떻게 해. 사람이 죽었네.”

“가족 분들에게 연락해야겠어요.”

지나가던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수석 김영수는 의자에 앉아 그토록 사랑하던 예수님의 품에 안겨 천국으로 가버린 지 오래였다. 향년 92세.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로 운구되어 가톨릭 장례식이 치러졌다. 마지막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품에 안겨

마지막 조국의 피날레를 아름답게 장식했다. 고인의 뒤에는 새해를 아름답게 맞이하려는 아름다운 여명이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장식하듯이 갈매기들도 슬피 울며 고인의 가는 길을 슬픈 노래로 애도(哀悼)하는 중이었다.

수석 김영수가 죽은 후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마지막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버릴 수 없다. 조국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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