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의 권투인생 7(마지막회)

2024. 3. 25. 10:18소설 모음

경일은 은퇴 후 자선단체를 하나 만든다. 2043년 6월 1일, ‘남아프리카 송재 장경일 자선기금’이 설립된다.

이 단체는 남아공의 가난한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학업의 기회를 주고, 나아가서는 여러 가지 운동도 가르친다.

2044년 6월 12일, 네덜란드인과 결혼한 경일은 2045년 9월 3일에 외아들 승준이를 낳았다.

‘남아프리카 송재 장경일 자선기금’은 남아공에 본부를 두고 콩고민주공화국,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보츠와나, 쿠바,

시리아, 리비아 등에도 퍼져 나갔다. 다만 한국에는 지부를 두지 않았다. 한국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조국을 배신한 놈이 만든 재단 따위는 필요 없으니 너 갈 길을 가라는 식이었다.

실망한 송재 장경일은 한국에는 절대 지부를 세우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다.

경일은 자선단체를 운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2056년 올림픽 성화 최종 주자로 나와 성화대에 점화했다.

그는 남자 축구 결승전 하프타임 때 미국 대통령에게 자유훈장을 받고, 2057년에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송재 장경일은 어느덧 80세가 되었다.

파킨슨씨병과 호흡기 질환으로 고생하면서도 자선을 멈추지 않았다.

그 후 한국에도 장경일 자선단체가 설립되어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등으로 퍼져 나갔다.

83세 때인 2091년에는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한국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리고 갈등과 저주를 이기고 힘차게 번영하고 있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한국이 자신을 용서했다고 느낀 후, 경일은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천국에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들과 손자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다.

“나는 이제 예수님 곁으로 간다. 나는 남아공에 묻히기 바란다. 내가 딴 금메달은 잘 간직하도록 해라.”

송재 장경일의 나이 향년 85세. 2092년 11월 2일에 송재 장경일은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세계 권투 역사 최고의 영웅이었다. 재단은 아들 승준이 계승했다.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주먹으로 좌절했으나 주먹으로 이겼다. 하늘의 별처럼 많은 그의 꿈과 흔적은 영원히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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