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11. 09:06ㆍ배구선수 김인석
소설
배구선수 인석이
堂井 김장수
배구 신동
배구선수인 대암(大巖) 김인석은 2001년 7월 2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3개월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다리를 저는 홀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그는 배구선수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워낙 가난해서 남들 다 하는 외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일터에 나가시는 홀어머니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셨다.
아침과 점심은 콩나물과 김치(주말이나 방학 때는 그거라도 먹지, 학교에서는 급식을 먹었다), 저녁은 라면을 먹었다.
그것도 혼자서. 왜냐하면 전에 말했듯이 일터에 나가시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 줄 겨를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인석은 어머니께 대들거나 운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가난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인석이 다니던 학교에서 먼 동네로 이사를 갔는데,
시에서 도와줘서 특별히 이사를 간 것이다. 어느 날, 장래희망을 적어오라는 쪽지를 받고, 인석은 배구선수라고 썼는데,
이것을 본 친구들과 학교 선생님의 놀려대는 수모를 참아야 했다.
이런 수모를 겪은 인석은 죽는 한이 있어도 배구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런데 인석의 등하교 길에도 놀림은 계속되었다. 인석이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간 이유이기도 했다.
인석이 배구선수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 어머니의 장애를 이유로 괴롭히는 사람들이 방관자들보다 더 많았다.
“야, 김인석! 너네 집은 가난하다며?”
“좋은 말로 할 때 학교 그만두고 노가다라도 해라!”
“친구 사이에 놀리는 것도 안 되냐?”
“인석아, 배구 포기해!”
그런데도 선생님은 아이들 편에서 인석에게 배구를 그만두고 취직하라고 압박했다.
아이들의 놀리는 것과 선생님의 괴롭힘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대학과 취직 이외의 길이 허용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놀림은 당연한 것이었으나,
인석은 훗날, 고통스럽고 괴로운 고뇌와 눈물의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홀로 배구를 익혔기에 성공할 수 있었으며,
배구를 혼자 익히며 기술도 혼자 힘으로 익혔으나 선생님과 주변의 설득과 괴롭힘은 견딜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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