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혼자가 아니다

2020. 4. 9. 21:12소설 모음

소설

이제 혼자가 아니다

堂井 김장수

 

홀로 남은 자신에게

2004년 3월 31일에 경기도 부천시 원미동에서 태어난 수경(修耕) 조영훈은 4살 터울의 누나와 부모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중소기업을 다니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 서울대학교 입학을 앞둔 누나와 유복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중소기업이 부도가 나고, 어머니마저 백혈병으로 쓰러지고 누나마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자, 영훈이는 더욱더 마음의 병이 깊어 갔다.

결국 2019년 2월 1일에 일이 터졌다. 집에 와 보니 부모님이 거실에서 쓰러져 있었고, 누나는 침대에 누운 채 숨이 끊겨 있었다. 집안의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하지 말아야 할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다. 그 후, 이 험한 세상에 홀로 남겨진 15살 영훈이. 영훈이는 부모님과 누나의 사랑이 그리워 고3 때까지 집에 올 때마다 울면서,

“엄마……, 아빠……, 나 부모님 없이 어떻게 살아요? 누나, 보고 싶어. 엉엉…….”

실컷 울다가 잠이 들어도 환청과 우울증을 이겨내기 힘들었다. 그래서 친척들의 도움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충격 때문에, 혼자 남았다는 슬픔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상처를 빨리 극복하고, 다시 세상 밖으로 적응할 수 있어야 했고, 친척들과 선생님들, 친구들의 도움으로 정신적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고모의 편지

얼마 전에 영훈이의 고모님이 자선단체에 편지 한 통을 보내셨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안녕하세요.

어느덧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다가오는 시점에 OO자선단체를 통해

저희 가족이 받은 위로와 지원에 감사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보냅니다.

저희 가족과 영훈이는 최근에 너무나도 큰 아픔을 겪었습니다.

뉴스에서 보던 사건·사고 같은 것은 남의 일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어느새 저희들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갑작스럽게 가족을 떠나보내게 되었지만 마냥 슬퍼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남은 조카 영훈이를 앞으로 어떻게 보살피고,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어주어야 할지 걱정이 밀려왔습니다.

고모인 저와 제 친정 부모님인 할아버지, 할머니가 함께 키우겠다고 다짐했지만,

마음만 앞서서 저희들 또한 여의치 않은 집안 환경에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걱정이 밀려와 정말로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가장 힘들고 앞이 보이지 않았던 그 때, OO자선단체 여러분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우리 가족을 위해 손을 내민다는 것은 너무도 감사했지만,

처음에는 선뜻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우리 가족의 마음을 모두 알고 있는 듯

OO자선단체 대표님께서 직접 연락을 해 주셨고,

따뜻한 위로와 함께 저희 가족에게 실질적으로 필요한 도움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지원해 주셨습니다.

조카는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한 사춘기 소년이었고,

하루아침에 화목했던 가족을 잃은 아이에게

친구들은 유일하게 남은 위로였기에,

OO자선단체의 도움과 고모인 제가 작게나마 보태서

조카 영훈이한테 익숙한 공간인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생활할 공간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가족이 무엇보다 더 감사했던 건 조카가 상처를 받지 않게

아픔을 살펴주는 진심어린 마음이었습니다.

이사를 하고, 조카가 학교에 다시 나가고, 또 최근에 생일을 맞을 때도

그렇게 부모님의 빈자리가 느껴질 바로 그 순간마다 바쁘신 일정에서도

OO자선단체 대표님이 직접 조카 영훈이를 찾아와 주셔서 함께 해 주셨습니다.

또 고양이를 키우고 싶어 하는 조카의 마음을 알고는

현재 조카와 함께 지내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설득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지금 형편에 애완동물을 키우는 건 사치라고 반대하셨지만,

상처받은 조카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는 지원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현재 조카 영훈이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애는 자신처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 있던 조카와 저희 가족에게

다시 따뜻한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셔서

OO자선단체와 후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영훈이가 부모님과 누나를 떠나보낸 슬픔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게

잘 부탁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고양이를 가족으로 맞아들인 그 후

OO자선단체가 영훈이와 상담하면서 느낀 것은 영훈이한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주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입양한 고양이는 다행히 영훈이에게 큰 힘이 되어주고 있는 덕분에,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슬픔에 밤마다 환청과 수면부족으로 약을 먹지 않는다면 잠을 잘 수 없었던 영훈이는 고양이가 오고 난 뒤부터 상태가 점차 호전되더니 이제는 밤에 약을 먹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많이 좋아졌으며, 가끔 환청에 시달리고는 있지만, 그나마 그 빈도도 줄었다. 영훈이에게 고양이는 단순히 애완동물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는 존재이자, 자신이 챙겨줘야 할 가족이 되었다. 영훈이는 고양이의 이름을 ‘덕이’라고 지었다. 집으로 고양이를 키우며 살게 될 영훈이가 말했다.

“누군가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생각에 책임감이 들어요. 꼭 나를 닮았어요. 고양이도 나처럼 엄마랑 아빠가 없이 혼자니까요. 제가 가족이 되어줘야죠.”

사건을 겪기 전이나 그 후에도 공부를 잘 했던 수경(修耕) 조영훈. 2019년 9월 2일, 그날까지도 다행히 상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으며, 고등학교 때 반장이 되었으며, 대학 수능 점수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만점이었다. 비록 가족을 여의었지만 조부모님과 고모, 고모부와 친척들의 사랑으로 오늘의 영훈이가 있었다.

새로운 다짐

의과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된 영훈이. 치과의사가 꿈인 영훈이였기에 꿈을 이루게 된다면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과 노인들에게 봉사하고 싶어했다. 그 꿈은 이루어지기까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영훈이는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고, 고양이 ‘덕이’로 인해 자신의 병이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게다가 새로 사귄 여자 친구 이현숙도 ‘덕이’를 좋아했으므로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 2개월 이후에는 영훈의 환청이 완쾌되었다. 간혹 부모님과 누나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올 때면 하느님께 부모님과 누나를 죽어서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곤 했다. 하지만 새로운 마음가짐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에 부모님과 누나를 생각하며 공부를 열심히 했다. 물론 현숙도 함께 공부를 도와주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 그리고 코로나 연구

4년 후, 학사 학위를 딴 영훈은 독일로 유학하여 석사 과정을 밟았는데, 슈투트가르트에 유학을 갈 때 현숙도 같이 갔다. 이현숙은 역시 의사 지망생으로 한국의 어느 대학 - 영훈이와 같은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영훈이와 같이 유학 중이었다. 결국 2년 후에 석사 학위를 받아서 3개월 후 독일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결혼식에서 두 사람은 굳게 맹세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지금까지 변치 않았으니 앞으로도 변치 말자고. 그리고 주변에서 받은 사랑을 타인들에게 되돌려 주겠다고. 얼마 후 두 사람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연구소에 입소하여, 미국 대학원 박사 학위 취득 후 연구소에 정식으로 취직을 했다. 영훈의 나이 26세, 2030년의 일이었다. 연구소에서 영훈이 맡은 연구는 2019년 말에서 2020년 초까지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키거나 죽게 한 신종 코로나 연구였다. 그 연구를 맡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말렸지만, 많은 생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며 꿋꿋하게 연구에 몰두했다. 물론 다른 교수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스크를 쓰고 손 소독제를 쓰며 연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신종 코로나 치료법 발견

신종 코로나는 침과 손을 통해 감염되기에 폐렴이나 감기를 유발하는 바이러스였는데, 영훈은 식사도 빠르게 하여 24시간 그 연구에 몰두했다. 이따금 부인도 도와주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여러 가지 화학물질로 연구하여 치료법을 알아내는 데 몰두하였다. 그렇게 5개월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영훈은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졌는지 슬라이드를 펼쳐 보았다. 새벽 3시가 넘어서도 슬라이드를 일일이 훑어보며 100장, 80장, 50장, 20장….

“아아, 오늘도 틀렸나?”

하며 마지막 슬라이드를 펼치던 그 순간,

“야아! 해냈다!”

라고 소리쳤다. 영훈은 이어서,

“됐다! 드디어 코로나 치료법을 알아냈다!”

라고 소리치며 자고 있던 부인 이현숙을 깨우기에 이르렀다. 그 연구는 이러하다. 아비간을 쓰지 않고도 무독성 치료제를 쓰면 신종 코로나19가 사흘 안에 낫는다는 연구였다. 이 연구가 세상에 알려지자, 2020년 초반기에 우한과 한국을 휩쓸던 신종 코로나19의 치료의 길이 열린 역사적인 쾌거였다. 영훈의 나이 27세의 일이었다. 이 연구가 세계에 알려지자, 영훈은 이 치료법을 학회에 공개했다. 이 치료법으로 신종 코로나 19 치료를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 사실이 고국에 알려지자,

“영훈이가 해냈어! 이제 코로나 따위는 문제없어!”

라고 소리치는 한국 사람도 있었다. 중국인들도 이 치료법을 환영했음은 당연했다. 이 연구로 인해 영훈은 미국에서 의학자에게 주는 상을 받았다.

 

그리운 고향에서

2032년 10월 9일,

“영훈이가 돌아온대. 잘 했어.”

원미 주민들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영훈의 가족들도 기뻐하며,

“우리 영훈이가 이렇게 큰일을 해낸 건 가문의 영광이고 우리나라의 영광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 동안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고통받던 우한 주민들과 한국 국민들은 더욱 크게 기뻐했다. 그 후 영훈의 연구에서 영향을 받은 연구가 줄을 이었고, 각종 코로나 치료제도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영훈이 고국에 돌아오겠다는 결심을 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영훈의 친구가 찍은 사진 중에는 너무도 늙으신 조부모님의 모습이 애처로웠기 때문이었다. 빨리 만나뵙지 않으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귀국을 결정한 것이다.

‘이거 큰일났구나. 내가 빨리 가서 만나뵙지 않는다면 조부모님은 영영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그렇게 결심을 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수경(修耕) 조영훈 부부. 그가 떠날 때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뿐이었으나, 돌아왔을 때는 수많은 시민들, 학자들, 기자들 등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환영과 축포를 터뜨리며 환영을 했다.

“수경 조영훈 박사 만세!”

“만세, 만세……!”

영훈을 환영하는 이 만세 소리가 인천공항 하늘에 울려 퍼졌다. 영훈은 인천공항 부근 호텔에서 이틀을 묵은 후, 김포공항을 거쳐 새로 생긴 서해선 철도를 타고 원미 동네로 갔다. 부모와 누나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크게 성공해서 고향을 찾아온 것이다. 고향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 영훈이 태어난 동네는 많이 변해 있었다.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보람찬 미래 사회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영훈이 조부모님이 살고 계셨던 빌라는 철거되고, 조부모님이 계신 새 아파트로 이사를 간 것을 안 영훈은 조부모님이 살고 계신 상2동으로 갔다. 영훈이 가는 곳마다 카퍼레이드가 펼쳐지고, 환영 행사가 줄을 이었으며, 길게 두 줄로 늘어선 학생들이 국기를 흔들었고, 하늘에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폭죽이 화려하게 터졌다. 그리운 집에 왔을 때, 연세가 많으신 조부모님과 고모,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이 영훈을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서 계셨다.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저 왔습니다.”

“오, 훌륭하구나!”

“잘 돌아왔다. 잘 했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손자는 가슴이 벅차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서로 잡은 손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아들 현수를 품에 안은 채로 말이다.

 

노벨 생리 의학상 수상

그리운 부천의 산천에 품에 안겨 어릴 적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훈은 즐거운 며칠을 보냈다. 영훈 부부는 조부모님께 절을 올리며,

“정말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정말로 장하다. 대견스럽구나.”

“지하에서 네 부모랑 누나도 보고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조부모님은 정말 감개무량했을 것이다. 증손자를 안은 할아버지는 싱글벙글했다. 증손자를 안고 기뻐하시는 조부모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얼마 후 서울에는 ‘수경(修耕) 조영훈 박사의 이야기를 듣는 모임’이 열렸고, 부산에서도 강연회가 열렸고, 강연회 도중에는 한국 학자로서 가장 명예스러운 상이 영훈에게 주어졌다. 그 상을 받은 영훈은 기뻐하며,

“이게 다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입니다.”

라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강연회가 끝난 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부 내외분, 고등학교 선생님 부부, 원경수 박사를 모시고 함께 갔다. 말할 것도 없이 해운대, 자갈치시장, 국제시장, 깡통시장 등을 구경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공부하느라 조부모님께 신경을 쓸 시간이 없었던 영훈은 가족들에게 맛있는 음식과 신기한 풍경을 구경시켜 드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얼마 후에는 갓 개통된 동해선을 타고 부산발 고속열차를 타고 정동진역에 갔다. 정동진역에서 해돋이를 보며 모두 새 날을 맞이했다. 그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영훈의 효성스러운 마음씨에 감탄했다.

“태어나서 이렇게 즐거운 때는 없었다.”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면서 좋아하셨다. 그리고

“이제 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영훈은,

“아닙니다, 할머니. 언제까지나 건강하게 살아 계셔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저는 무엇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며 할머니께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죽고 사는 것은 주님께 달렸느니라. 너는 우리 걱정은 말고 네 할 일을 열심히 하거라.”

라고 말씀하셨다.

서울에 돌아왔을 때, 영훈은 신종 코로나 연구 공로로 나라에서 주는 훈장을 받게 되었다. 영훈은 그 훈장을 모두에게 보이며,

“이것은 모두의 덕분입니다.”

라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얼마 후 영훈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고모부 내외분과 함께 스웨덴으로 가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영훈. 그 상은 우리나라의 과학사에 길이 빛날 공로를 세운 셈이 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국의 사람들 또한 기뻐했음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마지막 꿈

한국에 돌아와서 즐거운 나날을 보낸 지 어느덧 석 달. 영훈은 많은 사람들의 전송을 받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서,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다시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에 깊이 몰두하였다.

하지만 가족에게 소홀할 만큼은 아니어서, 외아들의 3세 생일 선물로 휴대용 컴퓨터를 사 주었고, 아내에게 결혼 10여년 만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아내의 손에 끼워 주었다. 또한 가족들을 데리고 디즈니랜드에 가기도 했다.

2033년 7월 22일에 미국에는 독감이 유행했는데, 영훈은 열심히 연구하여 그 독감의 병균을 발견했다. 이로써, 독감 치료에 큰 공을 세웠다. 수경(修耕) 조영훈의 이름은 점점 더 유명해졌다. 이 소식은 한국에 있는 할아버지에게도 전해졌다. 그 때 할아버지는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참 잘 해냈어. 다 주님의 은덕이지.”

할아버지는 베개 위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셨다.

평소 건강한 할아버지였지만, 쉽게 낫기 어려운 병에 걸린데다 손자를 그리워하다가 그리움으로 마음이 점점 약해져 갔다. 집안 사람들과 고등학교 선생님이 정성껏 돌보아 주고 신부님도 기도해 주었건만, 끝내 할아버지는 91세의 나이로 선종(善終)하고 말았다. 이 슬픈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영훈에게도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영훈은 마치 어린애처럼 큰 소리로 울었다. 부모님과 누나를 잃은 자신을 이렇게 키워주신 큰 은혜 갚을 길 없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신 이상, 할아버지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영훈은 너무 슬퍼서 견딜 수 없었다.

 

부모님과 누나를 여읜 천애고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를 거두어주셨네.

 

그 은혜 어떻게 갚을까 생각하니

어느덧 14년의 세월이 바람처럼 지나갔네.

 

큰 공 세우고 고향에 돌아갈 때도

아무 서운함 없이 맞아 주셨네.

 

이제 천국에서 만날 우리 할아버지

그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이제 천국에서 할아버지를 뵙게 된다면

이 손자가 사랑했다고 말씀드리리.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북중미의 아이티에서,

‘미국 독감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 곳에 오셔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

라는 소식이 영훈에게 왔다. 영훈은 급히 아이티로 달려가서 독감 예방 주사를 놓았다. 이 주사를 맞은 사람들은 미국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

“고마운 일이야. 정말 고마워.”

아이티 정부에서는 매우 기뻐하면서 박사 학위와 최고 훈장을 수여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들이 이 사실을 기사로 써서 널리 알렸다. 영훈은 그 후에도 멕시코, 중국, 몽골,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국 독감은 물론이고 전부터 연구하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이 때 리비아에서,

‘조영훈 박사의 예방 주사는 리비아의 코로나 바이러스에는 잘 듣지 않는다.’

라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훈은 이 소식을 듣고,

‘그럼 리비아로 가서 리비아에 맞는 예방 약을 연구해 보자.’

라고 결심하고 곧 리비아로 가려고 생각했는데, 2037년 6월의 일이었다. 그 때 리비아에는 심한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우한 폐렴보다 더 심했다.

“리비아에 가는 건 위험합니다.”

모두 이렇게 말렸으나,

“아닙니다. 위험하다고 연구를 그만둘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만류를 뿌리치고 리비아로 갔다. 최후의 한 사람까지 살려내겠다는 각오, 그리고 자신의 연구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수경 조영훈의 당찬 일면이었다.

 

최후

2037년 7월 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한 영훈은 사막기후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리비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을 진찰하고, 또 연구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 그 더운 기후에서 영훈은 날마다 밤늦게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자신의 건강이 점점 나빠진 것도 몰랐다. 마침내 영훈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고, 폐렴에 심장병까지 악화되어 2037년 9월 13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수경 조영훈 박사, 리비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쓰러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구촌은,

“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

라고 슬퍼했다. 세계의 신문들은 수경(修耕) 조영훈의 사진을 싣고 이 슬픈 소식을 지구촌에 전했다. 그리고 영훈의 지금까지의 높은 공을 기렸다. 한국에서는 과학기술훈장 창조장이 추서되었으며, 외아들 충재(沖齋) 조현수는 의사가 되었다. 수경 조영훈 박사는 그토록 온 정성을 쏟아 온 연구 때문에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연구가 결코 헛된 연구는 아니었다. 2020년에 대유행을 한 우한 폐렴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에, 마침내 2041년 3월 4일,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위험 질병으로 선포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납골당에 있는 수경 조영훈에게 아들이 쓴 글은 다음과 같다.

‘큰 슬픔을 이겨낸 그대, 인류를 위해 한 목숨을 희생하다.’

 

이 글은 노구치 히데요의 일생과 주인공의 일생을 비교해서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코로나 19 극복에 작은 도움이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