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수영선수의 고백 2

2023. 12. 18. 12:54소설 모음

나는 어렸을 때부터 몸이 컸다. 아버님은 중소기업에 다니셨고, 어머님은 행상을 하고 다니시며 3남매를 키우셨다.

3남매 중 외아들이었던 나는 어릴 적부터 헤엄을 잘 쳤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수영을 시작했고,

중학교 때는 전국체전에서 금메달을 땄다. 코치 선생님께서는 나를 많이 아끼셨고,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에는 최연소로 올림픽 예선에 출전하였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때 금메달을 땄다.

아버님과 어머님의 고생을 덜어드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아버님께서는 정말 잘 되었구나.”하고 다행이라 하셨다. 어머님은 식당에 취직하시면서도 나를 뒷바라지해 주셨다.

지금 두 분이 살아계셨다면 8~90대 정도는 되셨을 텐데,

지금은 수영으로 효도하고 싶어했던 내 나이 스물여섯의 나이에 암으로 돌아가시고, 어머님께서는 83세까지 장수하셨다.

내가 수영을 그만 두게 된 것은 스물일곱의 나이 때였다. 스물다섯 살 때 감기에 걸렸는데, 어느 병원에 가게 되었는데,

그 사건이 수영 선수 생활의 끝인 줄 몰랐다. 금지약물일 줄 몰랐는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 상태에서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은메달을 땄는데, 금지약물이 들통나자 모두 실격당했다.

나는 근처 동네 수영장에서 리우 올림픽을 기다리며 재기의 발판을 노렸지만, 대한체육회는 그것조차 용서하지 않았다.

김성환의 국가대표 자격을 3년간 금지한다!”

올림픽 진출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뒤,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러냐!”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자살 시도를 할까 생각도 했지만, 교회에 다니는 아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약쟁이라는 낙인도 찍혔다. 나는 결국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독신 권면과 회유와 설득에 시달려서 이제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무서워질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더 이상 교회에 미련을 갖지 말자고. 그리고, 다시는 수영 따위는 하지 않겠다고.

그 후, 수영연맹을 찾아가 그 동안에 탄 상들과 상금 등을 모두 반납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저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겠습니다. 제 처지조차 용서하지 않는 국민 여러분과 선생님들께 실망했습니다.

다시는 수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고, 그 동안 모은 상금은 수영 꿈나무들을 위해 써 주십시오.”

그 뒤 나는 결혼을 했다.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는다, 다시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 준 여자였다. 내가 군대 갈 때도 흔들림 없이 기다려 준 여자였다. 나중에 회상해 보니,

교회에서 괜찮은 선교사와 결혼하라는 압력이 있었나 보다. ‘약쟁이와 결혼을 왜 하느냐면서,

나와 결혼하면 파문시키겠다는 협박을 했나 보다. 하지만 아내는 결코 흔들리지 않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결국 결혼 후 파문당하였고, 우리 부부는 맹세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맞아들이되, 하고 싶은 대로 살자고,

그리고 다시는 수영 따위 하지 않겠다고. 첫 아이 영민이를 낳았을 때, 교회에서는 낙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그 청을 거부하고 건강하게 낳게 해 주었다. 영민이가 태어나던 날에도,

교회 식구들이 병실까지 쳐들어와

아기를 죽이지 않으면 셋 다 죽이겠다!”

라고 협박까지 했다. 우리 부부는 무서웠다. 우리가 낳은 자녀들이 교회의 희생물이 될까봐 두려웠다.

어머님께서 하신 말씀은, ‘교회 그만 다녀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결심했다. 무인도에 가서 살자고.

그 결심을 할 때 누나들은 나의 결심을 이해해 주었다. 누나들이 어머님을 보살피자고 결정하고,

나는 인천의 어느 무인도로 떠났다. 무인도를 싼 값에 사들인 뒤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