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0. 19. 12:02ㆍ피의 피날레
해외여행
그후 30년이 흘러 유림(裕林) 장세절은 58세가 되었다.
희선이의 슬하에 5남 3녀를 둔 유림 장세절은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본에서 쇼핑도 하고, 훈장도 받고,
라멘도 먹고, 재일 동포도 지원하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회고록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쓴 회고록의 이름은 《사랑 받고 사랑 주고》였다. 이 회고록에서 장세절은 이렇게 밝혔다.
“나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주기 위해 매사에 조심하며 살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정말 기뻤다.
마라톤이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력과 인내력, 정신력이 없이는 하기 힘든 것이 마라톤이다.
난 상관없지만 후배들의 고통을 잘 알기에 나는 마라톤 경기를 할 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 후 장세절은 64세 때,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된다. 그것은 아름다운 꽃잎의 피날레였다. 노벨상을 수령하고 귀국한 뒤,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많이 변해 있었다. 집에 와 보니, 할머니와 부모님은 돌아가신 뒤였고,
동생 세광이는 혜산으로 떠나고, 집은 폐허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도 뿔뿔이 흩어져 시골은 황폐해진 지 오래였다.
장세절은 노인이 된 권성우를 만나 경황을 들었는데, 그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 할머니와 자네 부모님, 마을 어른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없네. 이제는 학교는 폐교되고,
어린이는 얼마 안 남았다네. 그나마 부모들은 도시로 가고 없고, 이 마을에는 우리밖에 안 남았네.”
속상한 장세절은 이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했다. 스스로 마을의 촌장이 된 유림 장세절은
가족들을 데리고 마을의 활성화에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장세절의 노력으로 마을은 활성화되었지만,
인구가 줄어 걱정이 앞섰다. 2090년에는 인구가 다시 늘어 마을은 옛날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학교도 다시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