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꿈이기에 행복하다 4(마지막회)

2024. 12. 6. 09:49소설 모음

창식이는 재활과 훈련에 집중해서 얼마 후 기적적으로 심장을 치료했다. 창식이에게 심장을 기증한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그 후 창식이는 대아대학교 축구부를 거쳐 동신 돌핀스에 정식으로 입단한다.

처음으로 입단하던 날, 창식이의 부모님은 한없이 기뻐했다.

아빠가 술을 끊고 열심히 산 보람이 있었어. 앞으로 잘 하렴. 창식아, 알겠니?”

엄마도 이제는 한이 없구나. 열심히 하렴.”

이 할미도 이제는 죽어도 아무 원도 없구나. 창식아, 할미가 맛있는 거 해 줄게. 알겠지?”

얼마 후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다. 그 때 창식이는 축구 월급을 모아 엄마의 암 치료를 위해 치료비를 쾌척했고,

훗날 창식이는 그 병원에 10억 원을 기부한다. 어느 날 공익 광고 출연 제의 때는,

출연료를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에게 기부하곤 한 창식이. 그 후 외국 유명 구단에서 이적 제안이 들어왔다.

창식이는 그 구단에 입대한 후 가난한 국가인 에티오피아에 300억 달러를 기부했다. 하지만 그 후 비난에 시달렸으나,

그것조차 극복을 하지 못할 창식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사은(史隱)재단을 설립할 정도로

이제 창식이는 자산 408억 달러의 부자가 되어 있었다. 사은은 창식이의 호이다.

창식이는 외국 유명 구단에서 19년을 뛰고, 국가 대표 팀에도 참가하여 139경기 75골을 넣었다.

동신 돌핀스에 돌아와 그 구단에서 한 시즌을 뛰고 명예롭게 은퇴했다. 체육훈장 청룡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으며,

월드컵 우승, 아시안컵 우승, 동아시안컵 우승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후 사은 김창식은 자선사업가가 되었고,

매달 300만 달러를 벌어들인 이후에도 부모님께는 효자였다. 25세에 결혼하여 아들 셋, 딸 둘을 낳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에는 좋은 묘지에 고이 매장했다. 세월이 흘러, 김창식은 노인이 되어 있었다.

축구 대표 팀 감독과 유명 구단 감독을 맡고서도 대한민국에 이바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자선 사업가 노릇을 하면서도 늘 겸손했다.

김창식은 자서전 불꽃처럼 살다가 장미처럼 지는 인생에서 이렇게 밝혔다.

만일 가난하고 헐벗은 환경을 체념했다면 나는 평생 중소기업을 전전하며 평생 후회와 슬픔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에 열심히 축구를 했다. 가끔 승부조작을 권유받을 때,

그런 돈은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해서 한 번도 승부조작에 연루된 적이 없었다.

그 비결은 가난했던 시절을 늘 생각하며 겸손하게 사는 것이다.

교만은 패배의 원인이고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김창식의 죽음은 너무 늦게 다가왔다. 하지만 평안했다. 향년 103.

김창식은 그 후 통일 한국의 꿈을 바라보며 부모님 무덤 옆에 묻혔다. 생전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

모든 재산은 사회를 위해 써 주시오. 그리고 아들 셋과 딸 둘은 자립할 수 있도록 키웠으니 이것도 하느님의 은총이지요.”

사은 김창식. 그는 갔지만 그의 착한 마음씨와 뛰어난 재능은 모두의 가슴 속에 남아

한국 축구사의 한 획을 긋는 데 기여했다. 김창식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

 

여보시오, 여러분. 나는 가난에서 벗어난 자선 사업가였지만, 겸손하게 살았기에 주님이 기뻐하실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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