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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선수 김인석 3
지금 이대로 지낼 수 없으면중학교 1학년 때, 부잣집 아들과 같이 중학교에 다녔는데, 그 친구는 마음씨가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 학생이고,그 부모님도 착하신 분들이었다. 그 친구와 그 부모님은 성실하시고 정직하기도 하셨다.아무래도 자수성가형이어서 아들도 본받은 모양이다. 그 친구의 이름은 태은(邰隱) 전경문이다.점심시간에 그 친구와의 이야기에서,“인석아, 그렇게 가난한데도 배구하겠다는 이유가 뭐야?”“어머니를 위해서야.”“어머니를 위해서 배구선수가 되고 싶어?”“응.”“너 어머님께 효도하려고 배구하는 거구나?”“응.”“그런 거라면 우리가 도와줄게.”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배구에 전념하게 된 인석.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그 사이 어머니는 어느 골목에 조그만 식당을 하나 차렸고, 그렇게 크..
2024.09.14 -
배구선수 김인석 2
선생님의 반대초등학교 4학년 때, 결국 선생님이 인석을 호출하셨다. 선생님은 작심을 했나 보다.“김인석, 수업 끝나고 남아.”수업이 끝난 교실. 선생님은 인석에게,“인석아, 선생님이 원하는 건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해버릇 해서 취직하는 거야.선생님은 네가 배구에 매달려 학업을 소홀히 하는 것이 싫고 안타까웠어. 응? 응?”“……네.”그래서 살포시 안아주시는 선생님.“인석아,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다시 시작하는 거야. 남들처럼 똑같은 길을 가면서 공부 열심히 하고 대학 가서 취직하는,그런 모습이 보고 싶어. 어머니 장애시니까, 취직해서 정상생활 해버릇 하는……. 제발……. 응?”선생님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남들이 다 하는 것을 인석이도 하기를 바랐지만, 인석은 배구를 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런 것도 허용되..
2024.09.12 -
배구선수 김인석 1
소설배구선수 인석이堂井 김장수 배구 신동배구선수인 대암(大巖) 김인석은 2001년 7월 29일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에서 태어났는데,태어난 지 3개월에 아버지는 병으로 돌아가시고 다리를 저는 홀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어려서부터 가난했던 그는 배구선수라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래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워낙 가난해서 남들 다 하는 외식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일터에 나가시는 홀어머니는 저녁 늦게야 집에 돌아오셨다.아침과 점심은 콩나물과 김치(주말이나 방학 때는 그거라도 먹지, 학교에서는 급식을 먹었다), 저녁은 라면을 먹었다.그것도 혼자서. 왜냐하면 전에 말했듯이 일터에 나가시는 어머니는아들에게 맛있는 반찬 해 줄 겨를이 없으셨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아는 인석은 어머니께 대들거나 운 적이..
2024.09.11 -
현석이의 행복 19(마지막회)
에필로그우리는 환경을 소중히 해야 한다.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우리가 되자.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도 할 말이 생길 것 아닌가.지구 환경을 소중히 함은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후손들을 위해서 하나뿐인 지구를 소중히 아껴주자.우리 인류가 살아남는 길은 이것뿐이다. 주인공 현석이 이렇게 성공한 것은모두의 사랑과 관심으로 비롯되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모두의 사랑과 관심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끼친다.모두가 알아야 할, 그리고 반성해야 할 모두의 자화상이다.
2024.09.10 -
현석이의 행복 18
100세 이후102세의 나이까지 농사꾼으로 활동한 현석. 하지만 그도 자연의 법칙만은 어길 수 없어 흰머리가 늘었다.장남 선혁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환경운동과 남극 보호운동, 북극곰 보호운동에서 활동했고,차남 선길은 네덜란드, 벨기에, 핀란드,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돌아다니며 대사직을 역임했고,막내딸 선미는 환경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북마리아나제도에 가서 활약했다.그렇게 자식들이 환경 분야에서 크게 활약하여 흡족한 현석. 말년에는 가평의 어느 교회에 등록한 그는기도로 나날을 보내다가, 위암으로 끝내 쓰러졌다. 2122년 4월 15일, 자식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모두 수고했다. 나는 너희 세 명의 어머니와 너희 조부모님 곁으로 간다.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고,유산은 모두 기부하도록 해라. 나는 천국에서 너희들을..
2024.09.10 -
현석이의 행복 17
아내를 여의고87세에 아내를 여읜 현석은 홀로 남았다. 자식들도 손자들도 국민배당금을 받으면서도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현석은 89세의 노익장에도 환경운동을 열심히 하여 2102년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그리고 90세의 나이에도 회고록을 썼다. 회고록의 이름은 《통일 이후 한국살이》였다.이 회고록에서 현석은 이렇게 밝혔다. 만일 내가 부모님을 잘못 만났다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받고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헬조선’에서 ‘세계강국’으로 거듭난 대한민국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바라던 지상낙원이었다.학창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주변과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이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부모는 자식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살펴 주고, 자식은 부모님께 효도하며바른 학문과 배양된 체력, 실력을 가지고 사회..
2024.09.09 -
현석이의 행복 16
세월이 흘러어느덧 세월은 흘러 현석도 75세가 되었다. 현석이 정년퇴직 후 69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현석도 나이가 들었다.자식들도 결혼하여 나이가 든 현석 부부는 손자들의 재롱을 보는 재미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아내가 너무나도 나이가 들어 관절염에 심장병이 겹쳤다. 하지만 자식들이 병원에서 관절 수술을 해서 완쾌되었다.
202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