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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다녀오다
어제 강릉에 다녀왔다가 오늘 왔다.누리로호를 타고 강릉역에 내릴 때 비가 내렸다.완전히 강릉 가는 길을 몰랐다.센터에서 강의를 듣다가강의가 끝나고 책방에 들렀다가걸어서 찜질방에서간단한 저녁을 먹었다.오늘 아침에 찜질방을 나와서걸어서 고용센터까지 갔다.센터에서 교육을 받고오후 3시 58분에 택시를 탔다.그렇게 강릉역에서 기차를 타고 강릉을 떠났다.동해역에서 버스를 타고 삼척에 도착,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2024.07.23 -
용서받지 못한 골키퍼 4
월드컵에서 2통일 한국은 이 경기에서 반드시 승리가 필요했다.통일 한국은 과거 박항서 감독이 이끌었던 베트남을 이겨야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다.미국 LA 땅에 ‘대~한민국’, ‘오 필승 코리아’ 등의 관중들의 응원 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그러나 막상 베트남의 파상 공세로 한국은 계속 위기를 맞았다.전반전에는 막상막하(莫上莫下)였다가 후반 3분 베트남 선수한테 선제골을 내주며 위기를 맞았으나,후반 23분에 경세호가 동점골을 성공시킨 뒤 후반 41분에 ‘꾀돌이’ 장영태가 역전골을 넣었다.그러자 LA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그리고 후반 추가시간에 연성일이 쐐기골을 성공시킨 후통일 한국과 LA 경기장은 그야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 추가시간은 그 당시 3분이 주어졌는데,연성일은 후반 47분에 ..
2024.07.21 -
제 버릇 개 못 준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한국인 버릇이 어디 가겠습니까?먼 미래에 살아갈 우리 후손들이우리를 얼마나 욕할지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소름이 끼칩니다.
2024.07.20 -
용서받지 못한 골키퍼 3
월드컵에서 1드디어 그 때가 왔다. 때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당시 한국은 미국, 캐나다, 멕시코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첫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었다.‘꾀돌이’ 장영태, ‘현대판 일지매’ 권상우 등 당대 최고의 공격진을 구축한 한국은 그 어떤 팀도 쉽게 상대할 수 없었다.정찬식 역시 최강 통일 한국의 축구 선수 자격으로 월드컵에 참가했다.한국인들은 뛰어난 활약을 보인 정찬식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고그는 그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북중미 월드컵 본선에서도 골문을 완벽하게 책임지며 통일 한국의 결승 진출을 이끌었다.예선에서 파라과이를 1:0, 알제리를 2:0, 32강에서는 이란을 7:0, 16강에서는 멕시코를 3:1, 8강에서는 벨기에를 4:1,4강에서는 이탈리아를 3:2로 이겼다. 한국인들은 정찬식이 이번 월..
2024.07.20 -
안중근 의사를 만나 뵙고
안중근 의사를 만나 뵙고 堂井 김장수 하얼빈역의 총성 몇 발에 원수는 쓰러지고이윽고 울려퍼진 '카레야 우라'!이 한 마디에 하얼빈역 승강장은 뒤집어지고동양 평화를 이루려고숙명의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난 당신 당신이 이룬 공덕은 천지를 뒤흔드는데동양 평화를 위한 운명의 총성이여 나라를 위한 죽음도 어쩌면 숙명이기에당신의 어깨에 짊어진 동양 평화의 숙명 이제 나도 그 숙명을 이어받아서당신을 능가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 2019.2.6. 2019.7.7. 고침
2024.07.19 -
용서받지 못한 골키퍼 2
통일 한국에서의 생활하지만 통일 한국의 초기 생활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정찬식이 북한 주민만 만나면‘남조선 반동’이네 어쩌네 하는 욕설을 하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북한 동료들은 그를 만나면,“두고 보갔어. 너이 새끼 행동 조심하라우.”라는 협박을 한 것이 한둘이 아니어서 너무나도 힘들었다. 그는 결국 입단 3개월 만에 경주로 떠나게 된다.경주 불국사, 석굴암, 토함산 등을 거닐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또한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구단에서 활약을 하여 총 94경기에 출전했다.경주에 있은 지 얼마 후 국가대표로 뽑혔다.
2024.07.19 -
용서받지 못한 골키퍼 1
소설용서받지 못한 골키퍼堂井 김장수 기대를 한 몸에 받다한국 팀 최고의 골키퍼였던 정찬식.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골키퍼로 명성을 떨쳤지만 월드컵에서 실패자로 - 무슨 이유인지 - 낙인찍혀 자신의 축구인생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는 2000년 3월 23일 서울 노원구 상계동에서 태어났다.비록 가난한 산동네지만 정이 있었고, 부모님의 사랑으로 축구를 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기뻤다.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 축구부에서 골키퍼로 활약하며 명성을 떨쳤다.176cm의 작은 신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점프력이 뛰어나 아무도 그의 플레이를 함부로 평가할 수 없었다.서울의 축구단에 스카우트된 후에는 승승장구했다. 어떤 때에는 대한민국의 아시안컵 우승, 동아시안컵 우승,아시안게임 우승, U23 챔피언십 우승을 경험하기..
2024.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