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음(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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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사랑 5
3형제의 어려운 일생1975년 어느 날, 아버지 윤호 씨가 집을 떠났다. 당시 덕윤 씨는 다섯 살, 형은 아홉 살, 남동생은 두 살 때였다.부부가 이별해도 이혼은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평생 수절하면서도 아버지가 서울에 가시는 상황에도 시어머니와 3형제에게 사랑스러운 어머니였다.아버지가 떠났어도 3형제는 씩씩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해가며 손자들을 먹여 주시고,어머니는 밭에서 일하시면서 자식들을 정성으로 키웠다.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시였다.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주시는 적은 돈으로는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했기에,덕윤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3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이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4
자식들과의 상봉(2)덕윤 씨는 당황스러우면서도 기뻤다. 사실 덕윤 씨 3형제는 아버지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했다.아버지는 46년 전 어머니와 3형제를 떠났다. 하지만 덕윤 씨의 기억에는 아버지는 자주 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다.그런 아버지가 무사하시어 코로나19를 간신히 면하시니, 덕윤 씨는 너무 기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쩔 줄을 몰랐다.그 일을 어머니께 상의했더니,“죽은 사람 소원 들어준다는데, 한 번 만나보자.”이러시는 것이었다. 덕윤 씨의 형과 동생도 마찬가지였다.세월은 기 씨와 3형제의 관계를 돌려놓았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들은 가끔 안부 전화를 나누기도 했다.그저 오가는 형식적인 말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서로에게 진심을 담은 따뜻한 말도 가끔 나왔다.덕윤 씨는 아버지가 고시원에서..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3
자식들과의 상봉(1)2021년 1월 13일 수요일 오후, 기덕윤 씨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기덕윤 씨는 1971년 3월 4일에 태어났는데,아버지를 미워하던 순간도 있었지만, 중년이 되자 아버지를 동정해 왔다. 그런 때에 휴대전화를 받아보니,“여보세요?”“혹시, 기덕윤 선생님이 맞으신가요?”“네, 제가 맞습니다만?”“…주민센터입니다. 아버님이 기윤호 선생님이시죠? 부친께서는 무사하십니다.고시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는데, 부친께서 무사하셨다고 그러더군요.”덕윤 씨는,“아…”라고 입을 떼다가 아버지가 무사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아버지라는 단어를 입에 담아 불러보는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어도 말이다.“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습니까?”“고시원에서 혼자 지내셨어요.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2
일생의 기쁜 날기윤호 씨는 1평 남짓한 방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밀접 밀폐 밀집 등 이른바 ‘3밀’ 환경인 고시원에서는 5명의 확진자가 나왔다.윤호 씨는 원장 아들이 선물해 준 마스크를 쓰고 다녔기에 확진은 면할 수 있었다.한편, 46년 전 자식들 곁을 떠난 기윤호 씨.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식들에게 용서를 빌어야겠다고 결단했다.자칫하면 코로나 사망자가 될 뻔한 아찔한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그 순간에 감사하면서 자식들을 만나야겠다고 원장에게 말하자, 원장은,“최대한 도울게요.”이렇게 말했는데, 윤호 씨는 고마움을 나타냈다. 춘추(春秋) 79세의 일이었다.
2024.06.10 -
아버지의 사랑 1
소설아버지의 사랑堂井 김장수 고비를 넘기고기윤호 씨. 코로나19 때문에 하마터면 자식들을 영원히 만나볼 수 없을 뻔했던 사람.하마터면 무연고 고독사를 할 뻔했던 사람, 자칫하면 아들들을 만나보지 못할 뻔했던 사람.서울 어느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던 기윤호 씨였는데, 어느 날 유영미 원장에게 며칠 전 말했다.“나도 코로나 검사 받아야 하나?”그러자 유영미 원장은,“물론이죠. 그렇지 않아도 우리 고시원에도 확진자가 나왔대요. 다들 검사받으러 가셔야 해요.”유영미 원장은 이 말을 고시원의 모든 방을 다니며 말했다.그런데 이 말을 하지 않았으면 무연고 확진자가 될 뻔한 상황이었다. 2021년 1월 12일 화요일에,고시원은 오전부터 시끄러웠는데, 36호실에 사는 주민이 확진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고시원은 발칵 뒤..
2024.06.09 -
이제 혼자가 아니다 11(마지막회)
최후2037년 7월 말, 리비아의 트리폴리에 도착한 영훈은 사막기후의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리비아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을 진찰하고, 또 연구하며 여러 날을 보냈다.그 더운 기후에서 영훈은 날마다 밤늦게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자신의 건강이 점점 나빠진 것도 몰랐다.마침내 영훈은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렸고,폐렴에 심장병까지 악화되어 2037년 9월 13일,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수경 조영훈 박사, 리비아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쓰러지다.’이 소식이 전해지자 지구촌은,“너무 젊은 나이에 죽었다. 아까운 사람이었는데, 너무 안타깝다!”라고 슬퍼했다. 세계의 신문들은 수경(修耕) 조영훈의 사진을 싣고 이 슬픈 소식을 지구촌에 전했다.그리고 영훈의 지금까지의 높은 공을 기렸다. 한국에서..
2024.05.04 -
이제 혼자가 아니다 10
전세계를 돌아다니며북중미의 아이티에서,‘미국 독감이 퍼져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발 이 곳에 오셔서 저희를 살려 주십시오.’라는 소식이 영훈에게 왔다. 영훈은 급히 아이티로 달려가서 독감 예방 주사를 놓았다.이 주사를 맞은 사람들은 미국 독감에 걸리지 않았다.“고마운 일이야. 정말 고마워.”아이티 정부에서는 매우 기뻐하면서 박사 학위와 최고 훈장을 수여하였다.세계 여러 나라의 신문들이 이 사실을 기사로 써서 널리 알렸다.영훈은 그 후에도 멕시코, 중국, 몽골, 일본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미국 독감은 물론이고전부터 연구하던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 고생하는 사람들을 구해 주었다. 그런데 이 때 리비아에서,‘조영훈 박사의 예방 주사는 리비아의 코로나 바이러스에는 잘 듣지 않는다.’라는 소식..
2024.0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