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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선이의 꿈 1
소설명선이의 꿈堂井 김장수 장래가 촉망되는 여자 축구선수권명선은 1992년 3월 4일에 부모의 기대를 받으며 서울특별시 동작구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발재간이 좋았고, 공부도 잘했다. 부모님은 명선이가 의사가 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지만,축구를 좋아하는 명선이의 꿈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다.어릴 적부터 영특하여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문 등 각각의 언어를 배웠다.또한 축구도 열심히 해서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선수로 활약했는데,똑똑하고 마음이 착한 명선이에게 코치님은 흡족해하시며,“쟤는 훌륭한 축구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발 훌륭하게 커야 할 텐데….”하시는 것이었다. 이 말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더니, 아버지는,“축구는 취미로 즐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 딸은 의사로 키우고 싶습..
2024.06.18 -
아버지의 사랑 10(마지막회)
최후기윤호 씨가 2030년 11월 10일이 되던 해, 배가 아프다며 병원에 가봤더니, 췌장암 말기란다.그래서 윤호 씨는 덕윤 씨 3형제에게 유언을 남긴다.왜냐하면 췌장암 말기라서 손을 쓰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언은 다음과 같다.“얘들아, 미안하다. 앞으로도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고, 싸우지 말거라. 정말로, 고마웠다….”기윤호 씨는 그렇게 허망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88세. 3형제는 반듯하게 성장했고, 이름난 효자가 되어 있었다.손주들도 어엿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기윤호 가문은 이름난 효자가 많이 나오는 가문이 되었다.기 씨는 2030년 11월 23일 오후 서울의 한 추모공원에서 아들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장되었다.추모공원에는 전날에 내린 흰 눈이 그대로 쌓여 있..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9
못 다한 효도덕윤 씨 3형제는 부친을 모시고 주민센터에 갔다. 자식들이 힘을 합쳐 부모님을 모시고 못 다한 효도를 다하기 위함이었다.얼마 후, 송별연을 치른 3형제는 논산으로 떠났다. 논산에서 부모님께 못 다한 효도를 다하기 위함이었다.하지만 뜻밖의 돈이라든지 복권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후 3형제는 이름난 효자가 되었다.3형제에게서 오래 전에 멀어진 줄 알았던 아버지였지만, 이제는 더욱더 보고 싶은 존재, 사랑스러운 효도의 대상이 되었다.손주들도 훌륭하게 컸다. 이제 부모님과 3형제는 전처럼 ‘정(情)’을 사랑으로 나누는 관계로 되돌아갔고,부자 관계도 더더욱 돈독해졌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어림도 없을 사랑스러운 부자 관계였다.기윤호 씨는 3형제와 손자, 손녀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셨고, 며느리들은 ..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8
고시원을 떠나다일흔여덟의 나이가 된 기윤호 씨는 다시 낯선 천장을 마주했다. 좁디좁은 방과 어두운 복도,그리고 새로운 고시원 주민들. 당시 고시원 원장인 유 원장으로부터 이 사실을 안 가족들은 놀라는 표정이었고,어떻게든 만나자고 상의도 했다. 고시원을 떠나는 날, 기윤호 씨는 정들었던 고시원 주민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방 정리를 하고 옷가지와 각종 서류들, 박카스 10병과 동전 뭉텅이를 가지고 말이다.하마터면 코로나19의 희생양이 될 뻔한 윤호 씨.그 때, 덕윤 씨 3형제와 손주들이 어머니와 함께 윤호 씨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아버님, 보고 싶었습니다.”기덕윤 씨의 형이 먼저 부친에게 말을 건넨다.“네가 큰애냐? 많이 컸구나.”“아버님, 저희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아버님, 이제 아버님..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7
고시원에서홀로 시작한 고시원 생활은 생각보다 더 괴로웠다. 고시원은 그 당시 한마디로 ‘외딴 섬’이었다.방에서 홀로 누워 있으면 외로움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기 씨는 그럴수록 용기를 냈다.아침마다 장을 보며 직접 요리를 해먹고, 꼭 세탁소에서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외출했다.고시원 근처 청과물 가게에서 싸게 내놓은 과일을 가끔씩 사와서 고시원 주민들에게 인사를 건넸다.외딴 섬 고시원에서 느끼는 노년의 외로움을 이렇게 달래곤 했다.“기 선생님이 딸기 같은 걸 잔뜩 가져오셔서 나눠주면 총무나 주민들이 좋아했어요.고시원에서 신선한 과일 먹기는 쉽지 않습니다.고시원에서 지내는 20대 학생들은 아예 기 선생님을 ‘키 큰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꾸벅 인사를 했죠.총무들도 ‘선생님’ 이러면서 잘 따랐습니다..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6
잠시의 행복2010년 1월의 늦은 밤, 기윤호 씨는 조심스럽게 몸을 뉘었는데, 그동안 본 적이 없었던 낯선 천장.키가 180㎝에 가까운 기 씨의 발가락 끝에 고시원 벽이 닿을 듯 말 듯했다.68세의 나이에 맞이한 비좁은 고시원에서의 첫날, 추위를 뚫고 먼 곳까지 홀로 무거운 이삿짐을 날랐다.수중(手中)에 돈이 많이 있었으나, 직장에서 은퇴 뒤 아껴서 저축은 할 줄 알았다.기 씨는 첫 달 윌세 23만원을 내고, 다 큰 3형제에게는 손을 벌릴 생각은 하지 않았다.월 20만~30만원의 기초연금으로 버티면서도 간혹 친구를 통해 일거리를 구해 월세와 생활비 등을 충당했다.기윤호 씨는 셔츠와 정장 세탁을 세탁소에 항상 맡겼는데,그는 노년에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하면서도 항상 다림질한 셔츠와 정장을 갖춰 입고 다니곤 ..
2024.06.12 -
아버지의 사랑 5
3형제의 어려운 일생1975년 어느 날, 아버지 윤호 씨가 집을 떠났다. 당시 덕윤 씨는 다섯 살, 형은 아홉 살, 남동생은 두 살 때였다.부부가 이별해도 이혼은 하지 않았다.어머니는 평생 수절하면서도 아버지가 서울에 가시는 상황에도 시어머니와 3형제에게 사랑스러운 어머니였다.아버지가 떠났어도 3형제는 씩씩하게 자랐다. 할머니는 농사일을 해가며 손자들을 먹여 주시고,어머니는 밭에서 일하시면서 자식들을 정성으로 키웠다. 고향은 충청남도 논산시였다.아버지가 가끔씩 보내주시는 적은 돈으로는 생활비로 턱없이 부족했기에,덕윤 씨의 형은 차비를 아끼기 위해 10㎞ 거리의 등굣길을 고물 자전거로 다니며 버텼다.3형제는 가족을 떠난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부모님이 이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2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