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05)
-
올해 마지막 볼링 시간
아침에 택시를 타고 엄마랑 시내에 가서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은행에 들렀다.그리고 정오에 내 안경과 엄마 안경을 맞추고엄마는 홈플러스로, 나는 볼링을 치고 왔다.볼링을 한 지 몇 년 만에 나는 스트라이크를연속적으로 2번이나 했다.참, 볼링이 1시 30분에서 2시 30분까지 시작했고,볼링이 끝난 후 시장에 들렀다가점심은 짜장면을 먹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나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향에서 책도 읽고, 컴퓨터도 하고이제는 취직도 하고 싶다.그러면서도 정신과 약은 계속 먹어야겠지.여기도 정이 들었지만 일자리가 없다.교통도 불편한데다 너무 외롭다.이제 고향으로 가서책도 많이 읽고 지하철 노선도도 그리고 말이다.하지만 고향으로 가면 나는 혼자 살아야 한다.고향에 가면 집안 청소도, 요리도, 빨래도 해야 한다..
2024.10.23 -
고향이 그립다
나는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여기는 교통편이 불편하고,이웃들이 무섭다.그에 비해 고향은서점, 식당, 일자리, 문화시설이 많이 있다.여기에도 문화시설이 있지만한정되어 있다.나는 고향에 가서 살고 싶다.취직을 해야겠지만 말이다.
2024.10.23 -
어려움의 끝 3
◆중고등학교 시절중학교 때의 동혁은 39명 중에 중간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그 무렵은 학교 업무를 최신으로 전산화하던 시기였는데 ‘컴퓨터 도우미’라는 직책으로전산실에서 선생님들 심부름을 하면서 컴퓨터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됐다.인터넷이나 게임보다는 컴퓨터를 조립하고 수리하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며 재미를 느끼게 됐고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영어 매뉴얼을 가지고 고군분투했던 경험들이지금의 진로를 선택하게 한 밑거름이 되어준 것이었다. 단 한 가지 흠이 있다면어머니께서 직장에 다니시느라 동혁을 돌보아 주실 시간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동혁아, 학교 등록금은 엄마가 다 낼 테니까 학교 그만두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렴.”이 말은 동혁이 특성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도..
2024.10.23 -
어려움의 끝 2
◆어린 시절의 기억들1992년 3뤌 4일 서울특별시 중구 회현동에서 태어난 그는 아기(4개월) 때 부친을 여의었다.어린 시절에 IMF를 겪어 친할아버지와 친할머니가 양육을 해 주시고,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외갓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그 무렵까지도 한글을 떼지 못하여서 받아쓰기를 늘 틀리고 방과 후에는 나머지 공부를 했다.하지만 어린 동혁은 드라마를 전부터 좋아했다.그 시절에 드라마를 보며 선망의 대상으로 삼은 학교는 다름 아닌 KAIST, 즉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었다.‘나도 꼭 저런 학교에 다녀야지.’어린 시절의 동혁은 과학자를 꿈꾸는 소년이었다. 누구나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과학자가 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른 채 그저 부러웠을 따름이었다. 그 ..
2024.10.21 -
어려움의 끝 1
소설어려움의 끝堂井 김장수 ◆프롤로그삼안(森安) 정동혁 박사. 1992년 3월 4일생. 그는 미국 MIT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으로 일하고 있었다.하지만 세월이 흘러서는 대학 교수로 취직하여 미국에서 컴퓨터공학을 연구했다.가끔 조국이 보고 싶을 때는 일기를 씀으로써 그리움을 이겨 나갔다. 아침은 빵과 우유를 먹고, 점심은 초콜릿을,저녁은 아내가 해 주는 스파게티를 먹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이겨 나간다.하지만 동혁은 그 그리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그 동안 한국은 얼마나 변했을까?’그 그리움은 어쩌면 동혁에게 삶의 힘인지도 모른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 동혁은 생각한다.조국의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통일 한국의 좋은 점들을 두루 느끼고 싶은 것이다.하지만 연구에 바..
2024.10.20 -
피의 피날레 13
해외여행그후 30년이 흘러 유림(裕林) 장세절은 58세가 되었다.희선이의 슬하에 5남 3녀를 둔 유림 장세절은 일본으로 해외여행을 떠났다. 일본에서 쇼핑도 하고, 훈장도 받고,라멘도 먹고, 재일 동포도 지원하고, 바쁜 하루를 보냈다.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고, 회고록도 쓰기 시작했다.그렇게 쓴 회고록의 이름은 《사랑 받고 사랑 주고》였다. 이 회고록에서 장세절은 이렇게 밝혔다.“나는 정말 사랑받기 위해, 사랑을 주기 위해 매사에 조심하며 살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는 정말 기뻤다.마라톤이라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력과 인내력, 정신력이 없이는 하기 힘든 것이 마라톤이다.난 상관없지만 후배들의 고통을 잘 알기에 나는 마라톤 경기를 할 때 조심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그 후 장세..
2024.10.19 -
피의 피날레 12
제자의 올림픽 금메달 획득그 후 장세절은 미국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고, 어느 실업팀의 감독이 되었다. 제자들 중에는 장세절 팬들이 많았는데,그들이 직접 장세절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고, 덕분에 열심히 훈련에 열중할 수 있었다.하지만 지원은 그야말로 생색내기 수준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장세절은 직접 상부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다.“우리 마라톤 팀을 지원해 주십시오. 되는 만큼만 말입니다. 그래야 내가 선수들에게 할 말이 생깁니다.”그래서 가까스로 만족스러운 지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얼마 후 2028 올림픽이 열렸다.제자 중 이창원(李昌源)의 금메달 획득은 큰 성공이었다.깜짝 놀란 장세절 감독과 실업팀 사장은 훈련비를 올려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이행되었다.그 후 ..
2024.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