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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석이의 성공기 4(마지막회)
나는 지금 고향에서 충분히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다. 또한 집도 있다. 부모님, 장인어른, 장모님, 자녀 3남매, 아내,여동생, 처남, 조카 둘이 살만한 방이 5개나 되는 큰 집이 있다.나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방이 8개나 되는 큰 집을 지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다.내 이름 진석(進晳)은 ‘밝게 나아간다’라는 뜻이다.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신 이름이다. 어렸을 때 별명은 ‘범생이’였다.지금 내 별명은 은조룡(銀爪龍)이다. ‘은빛 손톱의 용’이라는 뜻이다. 체격 조건이 좋다 보니 농구가 내 삶이 되었다.여러 종목 중에서 굳이 농구를 택한 이유는 부모님이 농구선수가 꿈이었지만양가 조부모님의 반대로 공부를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자식의 결정을 존중해 주고 싶으셨나 보다.원래 건장한 체형은 아니었다. 하..
2024.11.04 -
진석이의 성공기 3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때까지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지는 자랑하고 싶지는 않다.공부는 선생님께 칭찬을 잘 들을 정도였다고나 할까. 아무튼 공부를 잘 한 건 다행이자 잘한 거 아닌가.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는 운동회 달리기에서 1등을 했다.학창 시절에 공부를 열심히 하다 보니 모범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그러다가 4학년 때 우연히 TV에서 농구를 보게 되었는데, 남자다운 매력과 멋있는 자세가 마음에 들었다.나는 이렇게 생각했다.‘나는 달리기에서도 1등을 도맡아 하고, 농구라는 스포츠도 마음에 든다.내 육상과 농구가 합한다면 최적의 결과를 낳을지도 몰라.’그렇게 농구선수의 길을 가게 된 계기가 이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아버님께,“아빠, 저 농구가 하고 싶어요.”이렇게 말씀드렸더니..
2024.11.03 -
진석이의 성공기 2
내가 전철로 농구하러 출퇴근을 할 때마다 소녀 팬들이 사인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어르신들은,“자네 농구 잘 한다며? 우리 손주들도 자네처럼 잘 자라야 할 텐데….”이렇게 말씀하신다. 난 때로는 곤란하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양가 부모님께 효도한다는 것,얼마나 복된 일인지 언젠가는 온 세상이 알아줄 것이라 믿고 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내 고향은 남양주시 오남면이었다. 그 곳은 그가 태어날 당시 농사일을 많이 하던 동네였다. 1남 1녀 중 내가 오빠였다.어릴 적에는 조부모님과 부모님과 나, 그리고 진현이가 가족의 전부였다.학교 친구들은 서로 사이좋게 노는 것이 일상이었다. 도둑질은 전혀 하지 않았다.어린 시절의 가정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으나, 아버님께서 학원 강사셨기에 그래도 입에 ..
2024.11.03 -
FC안양의 우승, 그리고 승격
FC안양이 드디어 2024 K리그2 우승과2025 K리그1 승격을 당당히 이루었다.축하할 만한 일이다.창단 11년 만에 드디어 우승이라니,믿겨지지 않지만 이것은 현실이다.용맹한 안양의 전사들이K리그1에서도좋은 활약을 보여주기 바란다.
2024.11.02 -
진석이의 성공기 1
소설진석이의 성공기堂井 김장수 내 이름은 강진석. 1989년생이다. 호는 문헌(文軒)이다. 나는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동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출퇴근할 때 남들은 차를 타고 출퇴근하는데 나는 대중교통 체질이어서 근처 별내역에서 전철을 타고 출퇴근을 한다.그럴 때마다 처남이 자동차를 몰고 별내역까지 바래다 주고, 퇴근할 때는 처남이 마중을 나온다.옛날에는 퇴계원역에서 경춘선을 타고 서울에 갔었는데, 그 때는 내가 어렸을 적 얘기였고,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지금 난 삼광 슈퍼스타즈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하고 있다. 그래서 선수로 활약하며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있다.나는 지금 부모님과 3남매를 둔 아내, 장인어른, 장모님, 여동생과 처남, 그리고 조카 둘과 살고 있다.지금 내게 딸린 우리 집 식구들은 자..
2024.11.01 -
어려움의 끝 9(마지막회)
◆에필로그가는 곳마다 강연을 하며 동혁은 보람을 느꼈다.2054년 3월 7일, 62세의 동혁은 미국에서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게 되었다.그러나 훈장 시상식에서 갑자기 심장마비가 온 동혁.의료진들이 동혁을 응급처치로 치료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삼안(森安) 정동혁. 그는 비록 허망하게 갔지만, 그의 업적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시신은 한국으로 운구된 후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 후 묘비가 세워졌는데, 묘비명은 다음과 같다.‘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 하지만 그 업적은 영원히 남으리라.’
2024.10.31 -
어려움의 끝 8
◆어느덧 두 아들 출생, 그리고 노벨상2027년 2월 19일에는 장남 정성연이, 2029년 5월 1일에는 차남 정흥연이 태어났다.장남 정성연은 커서 미국 예일대학 교수가 되었고, 차남 정흥연은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되었다.두 아들은 각각 컴퓨터와 기계공학에 재능이 있었다. 미국 대학을 졸업하여 과학 연구를 하더니,아버지의 연구를 널리 알려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어느덧 동혁은 두 아들의 재능에 감탄하여 뿌듯함을 감출 수 없었다.얼마 후 2030년 10월에 동혁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게 되었다.컴퓨터비전과 머신러닝으로 연구를 거듭한 결과가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2054년에 동혁은 드디어 통일된 한국에 돌아왔다. 통일 한국은 철저히 발전되어 있어 가는 곳마다 동혁 가족을 환영했다.자신이 살던 서울..
2024.10.31